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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31. 무정물 설법

slowdream 2009. 11. 17. 15:28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31. 무정물 설법
무정물 설법은 누가 들을 수 있습니까?
진정한 설법은 분별 않는 판단의 중지
기사등록일 [2009년 11월 02일 16:29 월요일]
 

“생명 없는 사물(無情物)이 설법을 할 때, 누가 들을 수가 있습니까?”
동산이 운암화상(782~841)에게 물었다. 그러자 운암화상은 “물론 생명이 없는 물건이 듣지”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동산은 “스님께서는 들으실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운암화상은 “만일 내가 듣는다면 너는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동산은 “저는 화상의 설법을 듣지 못합니다”고 하자 운암화상이 주장자를 내밀면서 “이 소리를 듣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동산이 다시 “듣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암화상이 “너는 나의 설법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생명 없는 사물의 설법을 듣겠는가?” 여기서 문득 동산은 깨닫게 된다.

 


 

무정물의 설법, 여기서 무정물은 생명이 없는 물건들을 총칭한 말이다. 생명이 없는 물건이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법을 설하는 것은 언어적인 사유가 가능한 생명이 있는 동물에게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아미타경』에서는 강물과 나무 그리고 새가 법을 설한다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어떤 스님이 법을 설하기 위해서 법상에 올랐는데, 마침 그때 여름인지라 냇가의 나무에서 매미가 귀가 먹먹할 정도의 큰소리로 울어댔다. 스님은 법문을 하지 않고 그 매미 소리가 다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을 지나 매미소리가 다하자, 스님은 “오늘 법문은 이것으로 마칩니다”하고 법상에서 내려왔다.

 

매미가 설법을 하고 마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정물의 설법이다. 무정물의 설법은 무분별의 설법을 말한다. 우리는 대상을 접촉하면 그 자체로 경험하기보다는 반드시 언어적인 사유, 해석, 판단의 필터를 거친다. 무정물의 설법은 침묵이고 분별하지 않는 판단의 중지를 의미한다. 이것이 진정한 설법이다.

 

이런 사례는 보조지눌의 『수심결』에서도 보인다. 어떤 승려가 보조국사에게 무엇이 불성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보조국사는 불성이란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러운 앎’, 공적영지(空寂靈智)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승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니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여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지눌은 “밖에서 나는 까마귀 소리를 듣는가?”라고 물었다. “예, 듣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것을 돌이켜서 그 성품을 들어보라. 그곳에 분별이 있는가?” “네, 이곳에서는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자 보조국사는 말하였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너의 불성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

 

여기서처럼 듣는 것은 분별과 무분별의 두 개가 있다. 분별은 ‘이것은 까마귀 소리이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그 분별을 알아차리는 이차적인 자각은 분별이 없다. 대상을 아는 것은 언어적인 분별을 수반하지만, 아는 것을 아는 것은 지혜이고, 깨어남이고, 언어적인 판단이 배제된 앎이다.

 

무정물의 설법은 분별이 없는 설법이고, 이것을 듣는 사람 역시 분별이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그것을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 운암이 주장자를 들고 “이 소리를 듣는가”라고 묻자, 동산은 그 순간에 무정물의 설법을 듣게 된다. 주장자의 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이다. 새소리는 귀로 들을 때는 분별하기 쉽다. 하지만 그 소리를 돌이켜서 눈에 본다면 그것은 분별이 없는 설법으로서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러운 앎을 체득한 것이다.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무정물의 설법이여.
귀로 듣지 말고, 눈으로 보아야만 알 수가 있다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1호 [2009년 11월 02일 1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