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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29. 암두의 일구

slowdream 2009. 11. 2. 18:01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29. 암두의 일구
언어는 연기적 관계로 얽혀 분별 불러
온갖 생각 없을 때가 바로 올바른 일구
기사등록일 [2009년 10월 21일 13:50 수요일]
 

어느 날 암두는 설봉, 흠산과 함께 차담을 나누었다. 설봉이 문득 차 사발에 담긴 물을 말하자, 흠산이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지”라고 말했다. 이에 설봉은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지 않지”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암두가 일어나 사발을 엎어버리고 나가버렸다.

 


 

흠산이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장애로부터 벗어나면 진리의 달이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러자 설봉(822∼908)은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인가? 물이 맑아야 달이 나타난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다. 그런데 맑으면 달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인가?

 

나타남이 긍정을 의미한다면, 부정은 긍정에 대한 이차적인 반응이다. 긍정이 있으면 부정이 있고, 부정이 있는 곳에 긍정이 있다. 이것은 분명하게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의 대립처럼 보인다. 모든 언어는 이렇게 상호 연기적인 관계로서 맥락 위에 놓여 있다. 흠산은 긍정을 설봉은 부정을, 양자는 긴밀하게 논리적인 관계로서 얽혀있다. 그런데 이때 암두(828~887)는 사발을 엎어버리고 나가버렸다.

 

이것은 명백하게 나타남의 긍정과 나타나지 않음의 부정을 모두 차버린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얽힌 맥락을 엎어버리고, 그 맥락에서 벗어나버리는 상징적인 행동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뒤에 남는 흠산과 설봉은 어떠한가? 이들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암두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을 할 것인가? 이런 경우는 긍정과 부정이 모두 배척당함에 대한 아픔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크게 웃으면서 차를 마신다. 암두의 행동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그들은 역시 훤히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암두는 왜 그랬을까? 다음 암두의 법문은 차 사발을 엎어버린 암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선의 핵심은 반드시 오직 일구(一句)를 아는데 있다. 무엇이 그 일구인가? 온갖 생각이 없을 때, 바로 올바른 일구이다. 이를 정수리에 머문다, 안주를 얻었다, 역역하고 성성하다, 바로 이런 때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때에 일체의 시비를 한결같이 타파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는 곧 이러한 때가 아니므로 긍정[是句]도 부정[非句]도 거부한다. 마치 한 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접촉하는 것은 곧 태워 버린다. 어떤 것이 거기에 가까이 가겠는가?”

 

긍정도, 부정도 그것들은 모두 언어적인 생각, 분별이다. 분별은 바로 긍정과 부정,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 젊음과 늙음, 높음과 낮음, 옳음과 틀림이라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 집착하게 된다. 흠산은 긍정에 설봉은 부정에 집착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암두는 이들을 모두 배척하고 그것들을 바로 차버림으로서 스스로 긍정과 부정을 뛰어넘어선 초월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일구이다. 이것은 관습적인 진리가 아니라, 궁극의 진리로서 일구이다. 이것은 불덩이와 같아서, 가까이 있는 모든 언어적인 관계, 개념들을 불태운다. 불태워버린 그 자리는 분명하고 분명하며, 또렷하고 또렷하다.

 

암두는 설봉과 함께 덕산의 제자로서 사형자제간의 관계이다. 암두는 매우 재기 넘치고 무엇보다도 불꽃같은 날카로움을 지녔다. 함께 차를 마시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박차고 일어서는 그의 행동은 확실하게 일구의 구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긍정과 부정은 잘못된 것인가? 뒤에 남겨진 설봉과 흠산은 왜 그렇게 크게 웃었을까? 자신들의 견해가 무참하게 깨져버렸는데도 말이다. 차 사발을 엎어버린 암두의 거친 행동에, 웃을 수 있는 그들의 가슴엔 무엇이 있을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9호 [2009년 10월 21일 1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