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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28. 언어의 감옥

slowdream 2009. 11. 2. 17:58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28. 언어의 감옥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 모습이 진여
사량분별 벗어나 보고 듣고 체험하라
기사등록일 [2009년 10월 13일 11:47 화요일]
 

임종을 앞 둔 덕산화상에게 이렇게 물었다. “영원히 병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까?” “있지.” 그 사람은 다시 물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러자 덕산화상은 “끙, 끙” 신음소리를 냈다.

 


 

병들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끙, 끙” 신음소리를 하면서 아픈 사람이다. 이것은 모순이다. 병들지 않는 사람은 끙끙 아파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덕산화상은 끙끙 아파한다. 이것이 병들지 않는 사람이라니. 이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하면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도 여기에 가까운 이해는 『금강경』의 부정의 논리이다.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을 언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 곧 그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말만 반야바라밀이다. 마찬가지로 끙끙 아픈 사람이 바로 영원히 병들지 않는 사람이다. 끙끙 아프다는 언어적인 방식으로 그를 이해하는 순간에 영원히 병들지 않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병들고 늙어간다. 몸이 쇠약해지고, 점차 기운도 없어진다. 이것이 그대로 진여(眞如)이다. 진여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고, 한결같다는 의미이다. 끊임없는 변화가 바로 우리의 모습 그대로다.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하지만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이다. 늙음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고, 병들면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다. 다만 조금은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지만,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다만 이것을 언어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대로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마조의 제자인 남전 스님에게 육긍이란 관리가 와서 병속의 새라는 우화를 이야기하면서 질문했다. 어떤 농부가 큰 병속에 새를 키웠다. 그런데 이 새는 점점 자라나서 밖으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육긍은 남전에게 질문하였다. 어떻게 하면 병을 깨뜨리지 않고 새를 죽이지 않으면서 밖으로 나올 수가 있는지를. 그러자 남전화상은 육긍대부를 크게 불렀다. 육긍이 놀라서 “네.”하고 대답하자, 남전화상은 “새는 이미 나왔네.”라고 대답한다.

 

새는 이미 나왔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병은 조직이고 언어이고 문화적인 한계이다. 우리는 이런 언어적인 안경, 감옥에서 살아간다. 세상을 바라볼 때, 대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지를 못한다. 항상 문화적인 배경으로서 언어적인 사유라는 관점에서 본다. 순수한 체험 그 자체로 나아가지 못한다. 병들고 병에 들지 않다는 관점에서 덕산의 끙끙거림을 본다면, 언어의 병속에서 갇혀있는 것이다. 끙! 끙! 아파하는 것은 그 자체로 순순 체험으로 경험되어야 한다. 이것을 병에 걸렸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사량분별의 병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또 있다. 바로 마조의 이야기이다. 마조화상은 어느 날 역시 많이 아프다. 그래서 절 산림을 맡아보는 원주가 병문안을 가서, “스님, 지금 병세가 어떻습니까?” 질문하자, 마조화상은 “일면불, 월면불”이라고 대답한다. 해와 같은 얼굴을 한 부처님, 달과 같은 얼굴을 한 부처님. 이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마조화상과 덕산화상은 병에 걸렸는가? 병에 걸리지 않았는가? 일상의 문화적인 배경, 관습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하게 병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은 곧 병이 아니다. 이름하여 병일뿐이다. 언어적 병속에서 벗어난, 지금 여기는 “일면불과 월면불”이고, “끙끙” 앓은 소리이다. 이것을 다시 언어의 감옥에 집어넣지 말라. 그냥 그대로 보고, 듣고, 체험하여 보라.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8호 [2009년 10월 13일 1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