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는데 그만 물러가게.” 용담화상은 덕산에게 말하였다. 늦도록 이야기를 하다가 덕산은 용담에게 인사를 드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밖이 너무나 어두웠다. 그래서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용담화상이 호롱불을 건네주었다. 덕산이 그것을 받아서 돌아가려는 때에 용담화상은 훅 불어서 꺼버렸다. 그 순간에 덕산은 깨달음을 얻었다.
덕산(780~865)의 경우처럼, 깨달음은 우연히 정말 뜻밖에 찾아온다는 말이 맞다. 덕산은 원래 율종에서 출가해 공부를 했기에, 경전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법문을 하면 『금강경』을 자주 인용하고 강조하여 ‘주금강’이란 애칭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이 부처라는 선종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덕산은 행장을 꾸려서 남쪽지역으로 행각을 떠났다. 덕산은 용담화상을 찾아가는 길에 떡을 파는 노파를 만났다. 배가 고파서 떡으로 점심을 하고자 바랑을 내려놓고 노파에게 떡을 구했다. 그러자 노파는 덕산에게 물었다.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스님은 과연 어떤 마음에 점을 찍어서[點心], 식사를 할 것인가?”
이 말에 덕산은 말문이 딱 막혔다. 그렇게 많이 본인이 스스로 강설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들은 변하고 인연의 결과이니, 그 무엇도 붙잡을 구석이 없다. 원래 이곳은 텅 비어서 얻을 것이 없다. 미래는 오지 않았고, 과거는 이미 지나 갔으며, 현재는 붙잡을 곳이 없다.’ 그렇다. 하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서는 마음에 점을 찍어야 한다. 어디에 찍을 것인가? 덕산의 논리적인 이해로는 찍을 곳이 없다. 과거, 미래, 현재, 어디에 찍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덕산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 점심을 못했다. 이것은 덕산의 자존심에 깊게 상처를 남겼다. 『금강경』을 그렇게 많이 강의하였지만, 평범한 노파의 질문에 대답을 못한 자신의 한계를 철저하게 느껴야만 했다.
이런 상처를 안고 마침내 용담에 이르렀다. 덕산은 호기를 부렸다. “용담에 왔지만 연못도 없고, 용이 보이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때 용담화상은 “자네는 바로 용담을 찾아 왔네”하고 말했다. 덕산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무엇이 용담이란 말인가? 연못도 없고, 용도 없는데…, 바로 용담을 찾아왔다고 하니 덕산은 말문이 막혔다.
덕산은 이곳에 머물기로 하고 행장을 풀었다. 어느 날 밤늦도록 용담화상과 법담을 나누고 나오다가 밤길에 어둠 속에서 호롱불을 건네받아 신발을 찾으려는 순간에 용담화상이 호롱불을 꺼버렸다. 순간 덕산은 침침한 어둠 속에서 깨닫게 됐다. 기뻐서 용담화상에게 큰 절을 했다. 무엇을 보았냐는 질문에 덕산은 “이제는 마음이 곧 부처임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고 대답했다.
덕산은 무엇을 보았을까? 어둠 속에서 호롱불을 받고서 신발을 찾는 순간에 엉뚱한 바람이 훅하고 호롱불이 꺼버렸다. 이 순간에 덕산은 무엇을 보았는가? 과거의 마음도 아니다. 현재의 마음도 아니다. 미래의 마음도 아니다. 무엇인가?
생각하면 곧 어긋난다. 존재하는 체험 그 자체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개념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을 멈추고 나아가 용담에 이를 수가 있고, 부처와 하나가 될 수가 있을까? 다음날 덕산은 그렇게 중시하던 자신의 『금강경』을 법당 앞에서 불태웠다.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7호 [2009년 10월 07일 1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