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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24. 위산의 반조

slowdream 2009. 9. 27. 23:58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24. 위산의 반조
내면의 불성은 되돌아 살펴봄으로 확인
회광반조는 진정한 내적평화 이르는 길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15일 14:05 화요일]
 

백장화상이 위산에게 화로에 불씨가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여 보라고 말했다. 위산은 대충 뒤져보다가 “불씨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백장은 일어나서 손수 화로를 뒤졌다. 그리고 작은 불씨를 찾아내서 위산의 눈앞에 보이면서, “이게 불씨가 아니냐?”고 물었다. 이 순간에 위산은 깨닫게 되었다.

 


 

위산(771~853)은 백장의 제자로 임제화상과는 동문이다. 모두 백장의 제자이나 임제는 임제종의 효시가 되었고, 위산은 위앙종의 태두가 되었다. 임제종이 인정사정을 두지 않는 매우 거친 가풍이라면, 위앙종은 섬세한 가풍을 가졌다. 이점은 그들이 깨닫는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제는 거칠게 얻어맞으면서 체득했고, 위산은 돌이켜 살펴보면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위산의 진리인식의 특징은 ‘되돌려 살펴보기(返照)’이다. 위의 문답에서 보듯이 화로의 불씨가 위산이 살펴볼 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백장이 다시 살펴보니, 작은 불씨가 있었고, 그것을 위산의 면전에 내밀고 “이게 불씨가 아니고 무어냐”는 백장의 말에 문득 깨닫게 된 위산이다. 이것이 바로 위앙종의 특징이 아닌가 한다.

 

현생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는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들도 감각기관을 통해서 어떤 알아차림이 있을 수가 있지만, 아는 것을 아는 이차적인 인식은 아마도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위산의 깨달음이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내면의 거룩한 불씨는 일차적인 사유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차적으로 다시 되돌려서 살펴봄에 의해서 그것은 확인된다.

 

이런 방식은 다음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어떤 승려가 위산에게 도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위산은 “무심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승려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산은 다시 “그렇게 이해 못하는 그 사람이다”고 다시 말한다. 그 승려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위산은 “바로 자네일세”라고 대답한다.

 

여기서도 문답의 특징은 되돌려서 살펴보기이다. 일차적인 사유과정이 아니라, 그 사유의 과정을 재인식하고, 그 사유의 근원에 놓인 자기의 불씨를 계속적으로 살펴보는 일이다. 이것이 위앙종의 특징이다. 마음의 화로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본래 부처를 우리는 만날 수가 있다. 위산은 이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 없는 생각의 묘함으로써, 신령한 내적 불씨의 무궁함을 돌이켜서 보라. 그래서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오면, 인간의 본성과 외적인 형상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리라.”

 

아는 것을 아는 인간의 능력은 두가지로 발현되었다. 하나는 과학의 길이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의 현상에서 어떤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활용하여 예측함으로써 그 대상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것으로 인류는 엄청난 문화적 혜택을 누려왔다.

반대로 또 다른 길은 종교이다. 종교의 길은 외적인 사물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내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되돌려서 살펴보기(廻光返照)’에 의해서 가능하다.

서구사회에서 발전시킨 전자가 사유의 길이라면, 동양에서 면면히 전승되어온 후자는 침묵의 길이다. 이렇게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4호 [2009년 09월 15일 1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