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승려가 물었다. “무엇이 제일구(第一句)입니까?” “삼요(三要)의 도장을 찍으니 붉은 점이 분명하여 주객(主客)으로 나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이 제이구(第二句)입니까?” “묘혜(妙慧)가 어찌 무착(無著)의 질문을 용납하며 방편(方便)이 어찌 번뇌를 끊은 근기(根機)를 저버리겠는가?” “무엇이 제삼구(第三句)입니까?” “무대 위의 꼭두각시를 보라. 밀고 당김이 모두 안에 있는 사람이다.”
임제가 설한 ‘삼구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임제 이후에 많은 논의가 있었다. 또한 그의 법을 이은 존장들은 삼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인천안목(人天眼目)』은 바로 이것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게송인 까닭에 임제의 삼구만큼이나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삼구에 관한 현대적인 해석으로는 삼구를 각각 수행자의 근기에 따른 차별성이냐, 아니면 차별 없는 동등한 관계로서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세 가지 표현이냐로 이해한다. 필자는 후자의 입장에 서 있다. 그래서 제 일구는 참된 인간의 존재로서 그냥 있는 그대로이고, 제 이구는 참된 인간의 방편적 표현이고, 제 삼구는 참된 인간의 행위 측면이 된다.
제 일구는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다. 하나는 삼요(三要, 진리)의 도장을 찍으니 붉은 점이 나타나고, ‘말을 하기도 전에 주객이 분명하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삼요(三要)의 도장을 찍으니 붉은 점이 분명하여, ‘주객을 나누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번역이 된다. 주객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전자는 일체를 포괄하는 절대의 긍정을 의미한다.
반면에 후자로 번역되는 제 일구는 주객으로 나눔을 허용하지 않기에 말하자면 절대의 부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부정과 긍정이란 양 측면은 결국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 말하기도 전에 모두 드러난 세계는 절대적인 긍정의 세계이며, 이것은 동시에 일체의 분별이 부정된 자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밖으로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해도 좋고, 안으로는 본래적인 성품(體)이라고 불러도 관계없다.
제 이구는 무착의 분별적인 질문을 묘혜(文殊)는 용납할 수 없지만, 방편마저 거절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번뇌를 끊어 초월하였지만, 현실적인 방편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문수는 방편의 분별을 통해 본래적 의미의 성품을 현실 속에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이구는 제일구의 방편적인 현실참여이며, 제일구가 바로 방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제 삼구는 무대 위의 꼭두각시가 움직이는 것은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을 따른다는 점이다. 곧 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임제가 말하는 붉은 얼굴을 한 참된 인간의 무위작용이라고 본다. 무대의 꼭두각시는 환(幻)으로써 진실이 아닌 허구이다. 그러나 무대 위의 연극은 진인의 작용으로 바로 본래 존재하지 않지만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드러냄이다. 참된 인간의 본질이 무대라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선종사 특히 임제종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삼구에 대한 논리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당 시대 이후로 갈수록 삼구는 일구(一句)로 통합되는 경향을 자주 보여준다. 오대(五代)의 혼란기와 북송시대를 살았던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는 상당하여, 임제의 삼현삼요(三玄三要)를 거론하고 ‘무엇이 삼현삼요(三玄三要)에 철저한 구(句)인가’를 물은 다음,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현(三玄)과 삼요(三要)는 그 현상을 분별하기 어렵네. / 뜻을 얻고 말을 잊어야 도에 친근 해진다. / 일구(一句)에 명명하다면 온갖 모양을 다 포괄하니, / 가을날 축제일에 국화꽃이 새롭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3호 [2009년 09월 08일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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