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임제가 상당하여, “붉은 살덩이에 차별(位) 없는 참 사람(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 얼굴로 출입하니, 확증을 잡지 못한 사람은 살펴보라.”고 말하였다. 그 때 한 승려가 물었다. “무엇이 차별이 없는 참 사람입니까?” 그러자 임제는 법상에서 내려와 그 승려를 움켜잡고 “말해, 말해라.”라고 소리쳤다. 승려가 머뭇거리자, 그 승려를 탁 놓아버리면서 “차별 없는 참 사람이 이 무슨 똥막대기인고?” 하고는 방장실로 돌아갔다.
부처와 조사를 비교하면서,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1)은 “부처의 가르침은 만대에 의지할 바이므로 활등처럼 말하고, 조사는 당대의 가르침이므로 활줄처럼 곧장 진리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여기서 ‘굽어진 활등’이 대기설법의 상세하고 친절한 방편을 의미한다면, ‘팽팽한 활줄’은 방편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을 상징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굽어진 활등에 비유하고, 선문답을 곧게 팽팽하게 긴장된 활줄에 비유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선문답 사례에서 다만 임제(臨濟, ?~867)가 한 말은 ‘차별 없는 참 사람은 그대들 몸에서 항상 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작 ‘위없는 참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임제는 설명하기를 그만 두고 법상에서 내려와서, 직접 그 승려를 움켜잡고 “말하라”고 다그친다. 이것은 굽어진 활등이 아니라, 분명하게 팽팽한 활줄의 방식이다.
당대의 임제보다 약 200년이나 지난 뒤에 지어진 북송 각범(1071~1128)의 『임간록(林間錄)』에 의하면, 임제에게 ‘차별 없는 참 사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던 그 승려의 이름은 용상(龍象)이라고 한다. 넘어진 용상에게 마침 곁에 있던 스님이 “왜 절을 올리지 않는가”라고 하자, 무심결에 절하고 일어서자, 온 몸에서 비가 오듯이 땀이 쏟아졌다. 바로 이때, 땀을 흘리는 그는 자신의 차별 없는 참사람을 크게 깨닫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임제의 역동적인 가풍을 각범은 “곧바로 보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貴直下便見), 사정을 조금도 봐 주지 않는다(不復留情)”고 평가한다. 이렇게 조금도 사정을 봐 주지 않는 선문답을 당·송대 조사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임제종뿐만 아니라 중국 당시 총림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다. 이것을 정형화시켜서 하는 말이 바로 그 유명한 ‘덕산방(德山棒), 임제활(臨濟喝)이다. 생각으로 헤아리거나 논리적으로 분별하는 습성을 끊어내고, 제자가 곧장 깨닫게 하는 활줄과 같은 방활의 가풍은 선종의 대표적인 기풍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가로질러 끊어가는’ 선문답의 특징적 성격을 경절(徑截), 혹은 ‘단박 깨닫는’ 돈오(頓悟)라고 부른다. 교학의 길이 논리적인 해설과 해명이 그 중심을 이룬다면, 선문답은 곧장 그 자리에서 진리를 드러냄을 중시하고 있다. “붉은 살덩이에 차별(位) 없는 참 사람(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 얼굴로 출입하니, 확증을 잡지 못한 사람은 살펴보라.”
차별 없는 참 사람은 누구인가? 무엇이 차별 없는 참사람인가? 그는 어떤 사람인가? 말해보라. 임제는 멱살을 붙잡고 말해보라고 말한다. 만약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2호 [2009년 09월 02일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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