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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20. 황벽의 침묵

slowdream 2009. 8. 30. 15:36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20. 황벽의 침묵
침묵은 모든 사량이 끊어진 자리
기사등록일 [2009년 08월 18일 15:15 화요일]
 

배휴거사는 자신이 이해한 바를 책으로 역어서, 황벽화상에게 보이었다. 화상은 좌석 옆에 두고 조금도 펴보지를 않았다. 한참 동안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배휴거사에게 물었다. “알겠는냐?”,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렇게 알 수 있다면 조금 낫겠지만, 이것이 어찌 나의 종지라 하겠는가?”

 


 

배휴거사는 불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황벽화상(?-850)은 그의 책을 열어보지도 않고, 옆으로 치우면서 깊게 침묵하였다. 그런 다음에 “알겠는가?”라고 질문을 할 뿐이다. 이후로부터 배휴거사는 황벽에게 귀의하여, 조석으로 방문하여 선법을 공부하였다. 오늘날 황벽의 법문으로 전해지는 『전심법요』와 『완능록』은 모두 배휴의 노력의 결과이다.

 

황벽은 백장화상에게서 사사받았다. 백장화상을 처음 방문한 황벽은 마조화상을 참문하고 싶었지만, 돌아가심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백장화상에게 그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때 백장화상은 마조화상의 악! 하는 소리에 사흘이나 귀가 멀었던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백장화상이 “그대도 훗날 마조 스님의 법을 계승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싫습니다. 저는 마조 스님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오늘 알았습니다. 그렇게 따라 했다가는 뒷날 후손이 없어질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백장화상은 크게 기뻐하였다.

 

어느 날 황벽은 백장화상에게 물었다. “위로부터 전해지는 가르침(宗乘)을 어떻게 보여주시겠습니까?” 이때 백장화상은 한참을 말이 없이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황벽은 곧 알아듣고, “앞으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배휴거사에 대한 황벽의 침묵은 바로 그의 스승인 백장의 침묵이다. 이 침묵에 대해서 『전심법요』에서 황벽은 이렇게 설명하고배휴거사(797-870)는 완릉지방을 다스리는 관리였다. 종밀에게서도 사사받은 적이 있는  있다. “이 신령스런 침묵은 종이나 먹으로 그림 그릴 수가 없고, 선악의 분별을 떠나있으며, 젊음과 늙음을 초월하고, 안팎이 없다. 이것은 크기도 형상도 색깔도 없다.”

 

침묵은 모든 사량이 끊어진 자리이다. 거의 모든 종교는 침묵을 매우 중요한 가치임을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도의 전통사상을 전승하여 주는 우파니샤드에 보면, 이와 유사한 유명한 문답이 나온다. 어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무엇이 자아입니까?” 그러자 스승은 침묵하였다. 그러나 제자는 알지를 못했다.

그래서 재차 “무엇이 자아입니까?” 물었지만, 스승은 역시 침묵이었다. 답답한 제자는 다음날에 마지막이란 각오로 다시 물었다. “무엇이 자아입니까?” 그러자 스승은 마침내 대답하였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 참된 자아인지를 잘 말하고 있지만, 네가 알지를 못한다. 자아란 바로 침묵이다.”

 

침묵! 물론 침묵이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미 침묵은 그곳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으로써 침묵은 다시 언어가 되고 분별이 되고, 달이 아니고 손가락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그렇다면, 붓다께서도 말하지 못하고, 전하지 못한, 궁극적인 하나, 이 말 없음의 경험에 어떻게 접근할 수가 있을까?

 

역사적으로는 이것은 세 가지의 길을 선택하여 왔다. 하나는 부정의 길이다. 무엇을 말하든지 “그것은 아니야”라고 부정한다. 이 길은 인도의 베다와 우파니샤드, 불교에서 중론의 길이다. 궁극의 하나는 부정을 통해서 드러난다. 물론 이 길은 잘못하면 부정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하지만 집착된 사량을 깨뜨리는데 유용하다.

 

반대로 두 번째는 긍정의 길이다. 이것은 일상에서 행위로서 드러내는 방법이다. 이 길은 중국 선종의 선택한 방식이다. 조주의 무자와 뜰 앞의 잣나무가 그렇고, 황벽의 침묵이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가장 간결한 최소의 언어, 언구이지만, 역시 분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의 장점은 일상에서 실천이 가능한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부정과 긍정을 넘어선 한 가지 방법이 더 있다. 이것은 내가 다가가는 방식이 아니라, 궁극의 하나가 곧장 직접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나는 방식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0호 [2009년 08월 18일 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