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화상이 어떤 승려에게 물었다.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스님이 대답하였다. “온 적이 있습니다.” 화상이 “차 한 잔을 마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승려가 찾아왔다. 조주화상은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승려는 “온 적이 없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때 조주화상은 “차 한 잔을 마셔라”고 말했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본 원주가 물었다. “온 적이 있는 사람이나 온 적이 없는 사람에게 모두 차 한 잔을 마시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화상은 “원주, 자네도 차 한 잔 들고 가게”라고 말하였다.
『조당집』에 나오는 이 문답은 참 통쾌하고 시원하다. 차 마심으로 말미암아서 있음과 없음의 분별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상쾌함을 느낀다. 동물과 비교하여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은 ‘언어’를 가지고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현생 인류를 호모사피엔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사유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사피엔스란 말은 ‘아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안다’는 의미는 ‘안다는 것’을 ‘안다’는 상위적 개념을 뜻한다. 동물의 경우도 감각기관을 통한 일차적인 의미로서 ‘알아차림’은 있다. 하지만 그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아는, 이차적이고 상위적인 ‘앎’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다.
위의 문답에서 조주화상의 방에 과거에 들어왔는지, 이제 처음 왔는지를 아는 것은 일차적인 사유가 아니라, 기억과 언어에 의한 이차적인 사유작용이다. 만약 개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그 개는 과거의 기억, 앎에 대한 이차적인 상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적절한 답변을 하지 못할 것이다. 조주화상의 방에 들어온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것은 일차적인 감각에 의지한 ‘대상언어’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에 기반한 이차적인 상위의 ‘메타언어’이다.
대상언어는 현재의 감각적인 경험을 나타낸다면, 메타언어는 일차적인 경험내용을 평가하고 조직화시키는 상위개념의 언어이다. 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인류는 엄청난 문화를 이룩하였다. 일차경험을 조직화하고 그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새로운 창조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자연현상을 경험하면서, 현존하지 않는 것을 예측하여 미리 대비하고, 오히려 자연을 자기 식으로 지배하려는 오만한 힘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인류는 아는 것을 아는 오만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대가로 많은 고통을 겪는다. 이를테면 환경의 파괴로 말미암아서 환경적인 재난은 제외하고라도, 어떤 위협적인 사건을 일차적으로 경험했다면,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인간은 이것을 분명하게 기억하여,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자동적으로 상상하고 예측함으로써,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차적으로 힘든 고통과 슬픔에 쉽게 휩싸이게 된다.
또한 끊임없이 사유하는, 초월적인 의식은 뿌리가 없는 뜬 구름처럼,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고,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는, 매우 고독한 존재로 만든다. 인간은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되고, 모든 것을 사유를 통해서 이해하고 소통을 한다. 하지만, 사유하는 인간은 풍요롭지만, 든든한 대지의 안전한 공간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불행하다.
불교경전에서는 이런 고통을 벗어나는 길로서, 화살에 비유하여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고 말한다. 고통의 본질을 이차적인 화살, 곧 언어적인 사유에서 찾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차화살을 맞지 않을 수가 있을까?
원주는 이 방에 들어온 적이 있는 사람이나, 들어온 적이 없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차 한 잔을 주는 이유를 조주화상에게 묻는다. 이것은 방안에 들어옴에 관한, 있음(有)과 없음(無)은 이차적인 분별, 사물을 파악하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으로서, 사유의 작용이다.
하지만 이것은 처음의 사건, 처음의 인간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처음의 사건이고, 최초의 그 사람인가? 있음과 없음으로 구별되기 이전, 최초의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차 한 잔 마시는 일’이다. 그 밖에 그 무엇도 없다. “원주!! 자네도 차 한 잔 마시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9호 [2009년 08월 11일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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