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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17. 조주의 무자

slowdream 2009. 8. 8. 23:25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17. 조주의 무자
의심 없으면 1700공안 모두 지식일 뿐
기사등록일 [2009년 07월 21일 10:37 화요일]
 

어떤 승려가 조주화상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화상이 “없다(無)”고 대답하였다. 그 승려는 다시 물었다. “경전에 따르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찌 없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조주화상은 “그것은 업식(業識)의 성품에 머물러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주록』에 근거한, 저 유명한 무자화두가 탄생한 문답이다. 이 문답은 훗날 간화선을 창안한 남송의 대혜 이후 수행자의 제일 관문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무문관』에서 제1칙으로 게재된 이후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진리에 들어가는 문답으로서 당(唐) 대의 공안(公案)과 하나의 언구에 의심하여 참구하는 송(宋) 대의 화두(話頭)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선종사의 시대구분의 문제이다. 만약 당대 선문답을 그대로 화두의 성립으로 보면 간화선은 송대가 아닌, 당대에서 성립되어 활성화된 것이 된다. 둘째는 당대의 선문답을 화두의 출발점으로 본다면, 간화선은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여전히 생태적으로 당·송대의 문답과 범주를 못 벗어날 것이다.

 

실제로 『조주록』에서 보여주는 문답과 『무문관』에서 다루는 문답은 서로 같지만, 그 접근하는 방식은 서로 다른 관점에 놓여있다. 참선의 지도자로서 조주는 『무문관』에서 제시하는 방법처럼,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언구 하나를 고집하여, 이것만을 수행의 도구로서 온종일 의심하여 참구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선대의 문답을 뚫어야하는 하나의 관문으로 인식하고 수행의 방법으로 구체화시킨 인물은 북송 대의 오조법연(?~1104)이다.

 

혹자는 간화선의 출발점을 『선관책진』의 첫 번째 법문인 황벽선사의 시중을 드는 경우가 있다. 이곳에서 ‘황벽은 십이시중(十二時中)에 오직 무자화두만을 간(看)하라’고 설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현존하는 그의 법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고, 황벽(?~850)과 조주(778~897)는 동시대의 인물이지만, 황벽은 조주보다 50년이나 더 먼저 입적을 했다. 더구나 『선관책진』은 명대의 만력28년(1600)에 출간된 것이다.

 

또한 개의 불성과 관련된 문답은 조주(趙州, 778~897)가 최초가 아니다.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는 조주화상보다 먼저 마조의 제자인 유관(惟寬, 755~817)에게서 보인다. 어떤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유관화상은 “있다.”고 대답했다. 그 스님은 “그러면 화상께도 있습니까?”고 묻자, “나에게는 없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개의 불성에 관한 문답은 당대에 매우 널리 유포된 문답이었다. 이것은 조주의 문답 가운데, 이를테면 조주의 감파(勘婆), 주조의 구화(求火), 조주의 끽다(喫茶), 조주의 세발(洗鉢), 조주의 만법귀일(萬法歸一), 조주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조주의 판치(版齒) 등등 셀 수 없는 많은 공안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이들은 모두 동일한 내용이다. 인연에 따라서 그때그때의 근기에 맞추어서 문답을 했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조주의 관심은 오직 궁극적인 하나에 있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이 ‘하나’는 어디로 갈까? 남전화상과 유관화상의 대답처럼, 이것은 중생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그렇다고 물건도 아니다. 무엇일까? “아니야. 아니야. 생각이나 추론하여 얻을 수가 없어.” 그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우리는 옛 조사의 문답에서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이 송대에 발전된 화두참구 수행법이다. 『무문관』에서는 ‘360골절을 가지고, 8만4천의 털구멍으로, 온 몸으로 의심을 일으켜서 무자(無字)를 참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궁극적 관심, 이것이 화두의 본질이다. 그런 까닭에 화두란 나의 실존적 문제로 닥쳐와야 하고, 단순하게 저기 과거의 문답이 아니라, 여기 현재에서 작용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화두이다. 궁극적인 의심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화두이고, 의심이 없다면 설사 무자화두도 화두가 아니다. 수많은 경전과 1700공안이 나에게 지식일 뿐, 내 삶과 무관하다면,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다 쓰레기가 아닌가?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7호 [2009년 07월 21일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