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마조는 백장이 오는 것을 보고, 법상에 불자(拂子)를 세웠다. 백장이 말하였다. “그것뿐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이 있습니까?” 마조가 불자를 본래 자리에 놓고 말했다. “너는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을 위하려 하겠는가?” 그러자 백장은 법상의 불자를 들어서 보였다. 그러자 마조가 “그것뿐인가? 다른 것이 또 있는가?” 물었다. 이에 백장은 불자를 본래 자리에 갖다놓고, 공손히 서 있었다. 이때가 마조가 큰소리를 질렀다.
백장이 오는 것을 보고, 마조가 불자를 세웠다. 고요한 허공에 하나의 불자가 세워졌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홀연히 하나의 몸짓, 의도가 생겨난 것이다. 제자를 위한 좋은 방편의 나뭇가지가 들판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백장은 여기서 “그것뿐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이 있습니까?”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한다. 이것은 지금여기의 문맥에서 벗어난, 분명하게 개념적인 이해에 근거를 둔 사량 분별이다. 이것뿐이라고 해도 옳지 못하고, 다른 무엇이 있다고 해도 역시 옳지 않다. 그러면 이곳에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까?
좋다. 표적을 어긋난 불자를 내려놓으면서, 인내심 많은 마조는 다시 백장의 관점에서 질문한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할 것인가?” 마조가 묻는다. 여기서 백장은 불자를 세웠다가, 마조가 했던 것처럼, 본래의 자리에 놓고 그냥 서 있다. 이런 백장의 응답은 동어반복이고 앵무새의 노름에 불과하지 않는가? 이곳에는 창조적인 활발함, 전체적 작용이 결여되어 있다. 대신에 사량 분별에서 오는 경직된 나무토막이 가로놓여 있다.
이때 침묵을 꿰뚫고 마조의 큰소리가 백장을 귀를 뒤흔들었다. 어찌나 큰지 나중에 백장은 이것을 회상하면서, 3일간이나 귀가 멀었다고 했다. 백장의 머릿속의 경직된 나무토막은 그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러면서 이 경험은 평생을 잊지 못한 채, 자꾸 이 순간이 그립다. 밭에 나가서 일을 하면서도 이때를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지고, 행복감으로 넘쳐 나온다.
여기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 어느 날 백장은 마조를 모시고 들판에 나갔다. 그때 들오리 떼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마조가 “저게 무엇이지?”라고 묻자, 백장은 습관적으로 “들오리입니다”고 대답했다. 마조가 “어디로 갔냐”고 묻자, 백장은 “날아가 버렸다”고 답했다. 그러자 마조는 백장을 코를 비틀었다. 백장은 마조의 코를 계속 비틀면서 “그래도 날아가 버렸다 할 것이냐?”고 다그쳤고, 이때 백장은 문득 깨닫게 되었다.
백장은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가? 들오리는 어디로 날아가지 않았는가? 아니면 들오리는 이미 날아갔는가? 어느 쪽도 옳지 못한, 적절한 대답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여야 하는가?
일상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언어적인 자극에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동인형이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와 인터넷을 통한 검색된 자료들과 일상의 자극에 노출되고 그곳에서 자동적으로 조정된다. 이런 자동조정을 깨뜨리는 것이 문답이다. 저게 무엇인가? “꽃이야.” 그게 어디로 갔지? “시들해서 쓰레기통에 버렸어.” 대답하는 너는 누구지? “나야, 나.” 아니, 그것은 언어, 말일뿐이고, 그렇게 말하는 그게 무엇이지?
문득 눈앞에 세워진 마조의 불자는 바로 우리의 자동조정 장치를 깨뜨린다. 한국의 숭산은 티베트 승려와의 문답에서 오렌지를 들이내밀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승려는 “한국에는 오렌지가 없나? 왜 자꾸 무엇이냐고 묻지?”라고 대답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때 우리는 그의 코를 비틀 수가 있을까? 아주 아프게 비틀면서, 오렌지라고 말을 하는 고놈이 무엇인가? 질문할 수 있을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5호 [2009년 07월 07일 1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