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남전화상의 회상에서 고양이 새끼를 놓고 양쪽의 승려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이것을 본 남전화상이 고양이 새끼를 잡아들고 말하였다. “누구든지 한 마디 말해보라. 그러면 살려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단칼에 베어 버리겠다.” 대중이 아무도 말을 못하자 남전화상은 고양이 새끼를 잘라버렸다.
나중에 조주가 돌아와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남전화상은 조주에게 동일하게 물었다. 그러자 조주는 신발을 머리 위에 올리고 나갔다. 남전화상은 “만약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 새끼를 살릴 수가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문관』14칙에 게재된 ‘남전참묘(南泉斬猫)’로 알려진 아주 유명한 문답이다. 과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아무리 진리를 드러냄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죽일 수가 있는가? 그것도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는 대승의 선종에서…. 이것은 일반의 윤리적 가치를 베어버린 것이 아닌가? 고양이를 베어버린 쇼킹한 이 문답은 이런 윤리적 가치와 관련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문답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기서는 일단 윤리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자 한다. 방편적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보편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일은 분명하게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 선택된 교육소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양이를 베어버림은 일종의 은유로서 혹은 상징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일단 이런 윤리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서 이 문답을 자체만을 보면, 매우 충격적인 경이로움을 만날 수가 있다. 용수의 중관사상의 핵심이 되는 모든 언어적인 희론을 벗어난 경험적 중도(中道)의 정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진리는 말로서 이해되거나 설명될 수가 없는 오직 직접적인 몸으로 체험되는 그것도 충격적인 방식으로 경험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말을 해도 삼십 방이요, 말을 하지 않아도 삼십 방이다. 말을 해보라. 그러나 어떻게 말을 한다는 말인가? 부처님께서도 45년간 말하지 못했는데, 말을 하는 순간에 벌써 어긋나게 되는데, 그렇다고 말을 하지 못하면 고양이는 죽는다. 생명의 윤리적인 가치로 무장한 우리는 고양이를 죽일 수는 없지 않는가? 어떻게 대답하여야 하는가? 고양이가 죽던, 삼십 방을 얻어맞던 선종의 위대함은,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우리를 끝까지 막다른 골목까지 몰고 간다는 점이다. 이런 철저함이 선종의 매력이 아닌가?
남전보원은 마조의 법을 계승하고, 안휘성 남전산에서 교화하였다. 화상은 손수 밭을 일구고 산에 올라 나무를 하면서 평상심(平常心)의 선풍을 펼쳤다. 남전화상은 백장회해(720~814)와 서당지장(735~814)과 함께 마조문하의 대표하는 선장이다. 어느 날 마조는 달구경을 하다가, “이런 날은 무엇을 하면서 보내는 것이 좋을까?” 물었다. 그러자 서장이 “공양을 올리기에 딱 좋은 날입니다”고 대답하였다. 백장이 “참선하기에 딱 좋은 날입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남전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일어나 가버렸다. 이에 마조가 “경전은 지장의 것이고, 선은 회해의 것이고, 오직 보원만이 격외에 홀로 초연하다”고 말하였다.
이 문답은 남전화상이 백장과 비교하여 마조문하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화이다. 물론 이런 대화는 후대에 첨가되었다. 하지만 남전화상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격외(格外)로 홀로 초연한 것, 이점이 바로 남전화상의 대표적인 특징이 아닌가 한다. 아래의 문답의 경우도 그의 가풍을 잘 보여준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남전화상에게 물었다. “설하지 못한 법이 있습니까?” 남전 화상은 “있지”라고 대답하였다.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설하지 못한 법입니까?” 그러자 남전화상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고 대답하였다. 말해보라. 이것은 무엇인가? 조주는 신발을 머리에 이고 방밖으로 나갔고, 남전화상은 빙그레 웃었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6호 [2009년 07월 14일 1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