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력을 할 때, 차 잎을 따면서 위산화상이 앙산에게 말하였다. “종일토록 차 잎을 따는데 그대의 소리만 들리고, 그대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본래의 형체를 드러내서 서로에게 보이자” 이때 앙산이 차나무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단지 작용만을 얻었을 뿐, 그 성품은 얻지 못했다” 앙산이 말하였다. “화상께서 어찌하시겠습니까?” 위산화상이 잠자코 있으니, 앙산이 말하였다. “화상께서 성품만 얻고 그 작용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위산은 “그대에게 방망이 20대를 때리리라”고 하였다.
성품(體)과 작용(用). 위의 문답에서의 중심 과제는 성품과 작용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것의 원류는 초기불교와 아비담마 불교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테면 몸은 몸과 움직임으로 구별할 수가 있다. 몸은 바탕으로서 성품이 되고, 걷고 서고 앉는 몸의 움직임은 작용에 해당된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경우도, 생각과 갈망은 마음의 행위에 속한다. 느낌과 감정은 마음에 의지하고 마음에 소속된다.
여기에 쟁점이 있다. 마음과 마음현상은 구별할 수가 있을까? 모든 것의 실재를 인정하는 유부(有部)학파는 마음(心王)과 마음현상(心所有法)은 서로 별개로 존재하고, 이들은 왕과 신하의 관계처럼 항상 서로 상응하는 관계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경전을 중시하는 경량부학파는 양자는 서로 구별할 수가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를테면 생각이 발생했다면 우리는 마음과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생각을 구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이 그대로 마음이고 마음이 그대로 생각으로, 몸통은 서로 하나이고 다만 이름만 다를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논쟁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유식불교에서는 ‘마음’과 ‘마음현상’을 구별하여 법체계를 세운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구별할 수도 있지만, 궁극의 입장에 서면 양자는 결코 구별할 수 없다는 절충적 입장을 선택한다.
그런데 중국 선종에서는 ‘성품’과 ‘작용’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논쟁한다. 홍주종은 마음과 마음현상을 구별하지를 않는다. 작용이 그대로 성품이요, 성품이 그대로 작용이다. 이점에 대해서 하택종은 성품과 작용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성품과 작용을 구별하지 않으면, 극단적인 경우에 건강하지 못한 살인행위도 그대로 마음의 본성, 성품이 되는 까닭이다.
위 문답에서 위산이 “차 잎을 따는데 너의 소리만 들리고, 너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본래의 형상을 드러내서 보이자”고 제안을 한다. 여기서 본래의 형상은 곧 바탕, 성품으로서 마음 자체를 말하고, 차를 따는 행위나 소리는 마음의 작용, 마음의 행위로 구별할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일차적으로 위산은 마음과 마음현상을 구별한 듯이 보인다.
그러자 앙산이 차나무를 붙잡고 뒤흔든다. 위산화상은 “너는 성품은 보지 못하고, 단지 작용만을 얻었다”고 말한다. 앙산이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위산은 침묵한다. 이에 앙산이 “스님께서는 성품만을 보고, 작용을 얻지 못하였습니다”고 대꾸한다.
마음바탕(性)과 마음현상(用)에서, 한 분은 마음의 바탕을 말하고, 한 분은 마음의 작용만을 말한다. 여기서 누가 잘못되었는가? 여기서 누가 20방을 맞아야 하는가? 여기서 어떻게 활로를 찾을 것인가? 말해보라.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5호 [2009년 09월 23일 1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