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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30. 어린 동산의 질문

slowdream 2009. 11. 17. 15:21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30. 어린 동산의 질문
무비판적 관습이 존재한다는 믿음 불러
언어적 사유서 벗어나야 실재 볼 수 있어
기사등록일 [2009년 10월 27일 13:26 화요일]
 

어린 동산은 『반야심경』에서는 눈, 코, 귀, 혀, 몸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 자신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 “나는 분명하게 눈도, 코도 있는데, 어찌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없다고 합니까?” 스승은 동산의 지적에 충격과 함께 감탄하였다.

 


 

동산양개(807~869)는 송대에 크게 일어난 조동종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반야심경』을 배우면서 눈, 코, 귀가 없다는 말을 듣곤 하지만, 그것이 왜 없는지를 절박하게 스스로 묻지를 않는다. 우리의 일상에서 나와 너는 실재하며 저기에 산과 강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을 소박한 실재론이라고 부른다. 소박하다는 의미는 무비판적인 관습적 믿음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다. 어린 동산이 바로 이것을 묻는다. 어쩌면 어린 아이들이 더 철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성세대는 기존의 가치, 관습과 습관에 이미 익숙하여 사물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서 질문을 할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데, 무엇이 나인가? 이런 질문은 바로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적인 질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눈과 귀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듣는다. 눈과 귀를 통해서 세상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눈과 귀가 없다고 한다. 얼마나 충격적인 선언인가. 이곳에서 의심이 없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다.

 

물론 우리는 나와 너가 없고 산과 강이 없음을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는 있다. 이를테면, 무엇이 산인지를 질문하여 본다면, 대답하기가 참 곤란하다. 산에는 봉우리가 있고, 골짜기도 있고, 나무도 있고, 꽃도 있다. 그러면 무엇이 산인가? 산이란 낱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위에서 언급한 이들 전체가 과연 산인가? 이들 전체란 실재가 아니라, 개념이 아닌가? 산이란 인간의 사유방식이 만들어낸 표상이 아닌가? 관습적으로 개념화되고 표상된 이미지로서 인간의 언어적인 사유가 만들어놓은 도식, 허구의 영상으로서 산이지, 산은 저기에 실제로 존재하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실질적으로 내가 보는 꽃이고 나무가 아닌가? 이것은 산이 아니지 않는가?

 

산이 단지 언어로서 인간의 인식하는 방식이고,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면,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라면, 꽃과 나무를 바라보는 눈은 무엇인가? 이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무엇이 눈인가? 눈동자가 눈인가? 아니면 망막이 인가? 눈꺼풀이 눈인가? 이것들이 모두 아니라면, 눈은 무엇인가? 스스로 눈은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래도 눈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언어적인 가치부여이다. 단지 언어적인 습관이다. 이렇게 저기와 여기의 사물은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문화의 형태, 대화를 위한 언어적인 방식이라면, 실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반야심경』의 말이 오히려 진실이 아닌가?

 

문제는 이것 역시 언어적인 이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념을 잡고서 우리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달을 본다.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본다. 달 그 자체로서 보지 않는다. 언제나 나의 달은 문화적인 형태로서 공통의 언어와 사유방식에 의해서 나의 마음에서 드러난 표상이고 이미지이다. 실재하는 달은 아닌 것이다.

실재하는 달을 곧장 그 자체로서 경험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사유의 필터, 이 안경을 벗고서 보아야한다. 어떻게 굳어진 안경을 벗을 수가 있다는 것일까? 이것은 조금은 충격과 같은 방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도적적인 질문이다. ‘참으로 무엇이 당신인가?’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0호 [2009년 10월 27일 1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