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이 목주화상을 처음 참례할 때, 목주화상은 운문을 보자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운문이 문을 두드리자, 문을 닫는 채로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름을 말하자,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운문은 ‘자신은 참다운 자신을 찾고자 한다’고 대답하였다. 목주는 문을 열고 운문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이후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지만 거절을 당하였다. 이렇게 이틀을 두드렸다. 3일째 되는 날, 목주가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운문은 이때다 싶어서 힘껏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목주는 운문을 붙잡고, 큰소리로 ‘말해봐!’, ‘말해봐!’ 외쳤다.
운문이 아무런 말도 못하자, 목주는 문밖으로 내밀치면서 문을 닫아 버렸다. 이때 문에 끼인 운문의 한쪽 다리가 크게 다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 운문은 선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은 운문종을 개창한 인물이다. 운문은 어려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이후에 율장공부를 하였다. 나중에 황벽의 법을 이은 목주도명에게 선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저 유명한 언구인 ‘매일 매일이 좋은 날(日日是好日)’로 유명하다. 하지만 운문은 스스로의 가풍을 평가하여 ‘높고 험준하고, 물살이 빨라서 고기들이 머물지 못한다’고 했다.
거친 가풍으로는 임제를 떠올리지만, 운문은 그보다 한수 위였다. 이것은 목주에게서 물려받은 가풍이 아닌가 한다. 물론 운문은 설봉의 법을 계승하지만, 설봉은 매우 부드러운 선승이었다.
선문답을 보면 대부분 깨닫는 사람은 스승의 도움도 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자의 열정이다. 이것이 없으면 깨달음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운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도를 묻기 위해서 찾아갔는데 목주화상은 운문을 한 번 보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계속 문을 두드렸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문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이쪽은 깨닫지 못한 미혹의 언덕이라면, 닫힌 저쪽은 깨닫는 도의 세계이다. 운문은 저쪽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문안의 저쪽을 향한 포기하지 않는 굳은 의지가 깨달음의 결정적인 부분이 아닌가 한다.
이틀을 계속 찾아가서 계속 두드리지만 열리지 않는다. 3일째 되는 날 마침내 열렸다. 다시 닫히면 영원히 들어가지 못할 거야. 오늘은 무조건 밀고 들어간다. 밀고 방안으로 들어갔는데, 묵주화상은 갑자기 멱살을 잡고 ‘말하라’고 한다. 무조건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말하라!’고 다그친다. 당황한 운문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대로 문밖으로 다시 내동겨쳐진다. 그리고는 거칠게 문을 다시 닫아버린다. 이때 다리가 끼어서 부서질 듯이 아프다.
이 아픈 순간에 운문은 자신의 본성을 깨닫게 된다. 분명하게 아픔은 언어가 아니다. 그 순간에 정신 번뜻 난다. 어둠 속에서 번개가 내리치듯이 알 수 없는 안개 속에서 ‘무엇이 나인지’ 문득 한줄기의 서광이 비치면서,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부처도 전할 수 없는 나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운문이 스스로의 가풍을 평가하여 험준하고, 물살이 빠르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바이다. 왜냐면 이것은 언어적인 설명으로는 경험하거나, 전해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2호 [2009년 11월 09일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