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운문이 설법을 하였다. 이때 부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선언하신 내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내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일격에 쳐서 개밥으로 던져주었을 것이다. 그래야 천하가 태평하는데 조금이라도 공헌을 했을 것이다.”
필자는 운문의 위의 법문을 처음 듣고서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아주 오래된 아마도 20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 불교에 심취했던 필자는 부처님의 생애에서 자주 언급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에 대해서 어떤 의미인지를 궁금해 하던 때였다.
‘하늘 위와 아래에서, 나 홀로 존귀하다’는 구절은 매우 배타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성경에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든지, 혹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이 저희 것이 아니다’와 같은 말처럼, 하늘 위와 아래에서 오직 부처님만이 존귀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도 성경처럼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르침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당시에 필자는 ‘나 홀로 존귀하다’는 구절에서 ‘나’를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 혹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같은 일반명사로 이해하기를 원했다. 그러면 인류의 보편적인 불교의 가르침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운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격에 딱 쳐서 개밥을 주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말하니 그냥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구절은 지금도 다시 읽어보면 여전히 전율이 남기고, 무한한 깊이의 내면을 경험하게 한다. 자신이 스승이고, 지혜 있는 많은 분들이 존경하고 귀의하는 거룩한 대상을 개밥을 주겠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인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종교의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종교성의 확립과 관련된 문제이다. 선종은 가장 극적으로 종교의 믿음과 그 신앙의 확립은 외적인 대상에서 얻을 수가 없고, 오직 스스로 내면에서 스스로의 자각과 확신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외적인 어떤 초월적인 대상을 의지하게 되면 그것은 잘못하면 우상숭배가 되거나 미신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곤 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곤 한다.
이런 경고는 운문뿐만 아니라 임제나 단하선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임제는 어느 날 말하였다. 진흙으로 만든 부처는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철과 목재로 만든 부처는 불길의 아궁이 속을 건너지 못한다. 진정한 자성의 부처만이 모든 현상을 뛰어넘어 진실하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단하선사가 나무로 된 부처를 불태우자 제자가 놀라서 부처님을 쪼개고 불태운다고 탓하자, 선사는 태연하게 “사리가 나오나 보려고…” 대답한다. 그러자 제자는 “어떻게 나무속에서 사리가 나옵니까?” 반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 선사는 “방금 전에 넌 부처님이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다.
오늘날 종교집단에서 귀의 대상은 대부분 상징물이나 이미지가 그것을 대신한다. 하지만 이렇게 귀의 대상을 만들어버린 순간에 그곳에는 본질은 없고, 허상과 의식만 남게 된다. 부처나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실존하는 ‘나’가 중요한 출발점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나인가? 하늘 위와 아래에 홀로 존귀한, 도대체 이 나는 무엇인가? 대답하여보라.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3호 [2009년 11월 17일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