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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42. 변증법적 침묵

slowdream 2010. 2. 16. 16:55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42. 변증법적 침묵
말하면 속이는 것이요 말 않으면 모독
수행에서 변증법적인 과정은 번뇌 일부
기사등록일 [2010년 01월 25일 18:05 월요일]
 

천의 스님이 취봉화상에게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취봉화상은 명각 스님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이것과 저것도 아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천의 스님은 이런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려면 취봉화상은 대답을 하지 않고 내쫓았다. 어느 날 천의 스님은 물지게를 지고 오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물이 온통 바닥에 쏟아져 버렸다. 이 순간에 천의 스님은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무엇을 말할 수가 있을까? 이것은 부질없는 헛고생이다. 그렇지만 원고독촉을 받는 가엾은 필자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부질없는 헛고생과 구업을 각오해야만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허물을 피해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여기서 숨을 쉬어야 한다. 바닥에 물을 다 쏟아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현실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침묵이 피해갈 수는 있을까?

 

언어적인 한계를 깨뜨리는 일은 언어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 이것과 저것이 모두 아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언어를 통해서는 다시 언어의 감옥에 스스로 갇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죄수를 벗어나게 해야 하는데, 다시 새로운 감옥에 죄인을 가두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질없는 헛고생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래서 의단화상은 “말을 하면 모독이요, 말을 하지 않으면 속이는 것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히려 말을 하면 속이는 것이요, 말을 하지 않으면 모독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대중을 속이고 있다. 말 있음과 말 없음은 대립된 갈등이다. 논리적으론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있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없음이 생겨난다. 있음과 없음의 갈등을 지양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종합이다. 이러나 이런 종합은 논리적인 측면을 말하는 까닭에 종합은 다시 하나의 견해가 되고, 이런 견해는 다시 새로운 반대의 견해를 세우게 된다. 이런 순환적인 과정은 끝이 없다. 이곳에는 휴식이 없다. 물론 역사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명상수행의 길에서 이런 변증법적인 과정은 번뇌의 일부이다. 종합은 고통과 번뇌로부터의 벗어남, 혹은 자유로움, 곧 깨달음이여야 한다. 이러한 때에 비로소 언어적인 논리의 순환 고리는 멈추게 된다. 여기서 윤회가 멈추게 된다.

 

삶이란 고통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명제이다. 이런 고통에 대한 반응이 존재한다. 이것은 명제에 대한 반명제이다. 고통은 삶의 조건이다. 이런 조건에 대해서 우리는 평가를 하고 판단을 하고, 그래서 억압하거나 회피를 한다. 억압과 회피는 반명제이다. 그렇다면 종합은 무엇일까? 명제와 반명제를 통합하는 하나는 무엇일까?

 

이것은 논리의 길이 아니다. 이것은 고통을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일어난다. 논리적인 견해는 일종의 회피이고 자기 방어적인 헛된 노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침묵과 언어의 갈등에서 빚을 갚을 수가 있을까? 이것은 체험의 길이다. 바로 ‘물지게를 지고 오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경험이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부질없는 헛고생이다. 눈봉사가 눈 밝은 사람을 끌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웃긴 일, 넌센스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3호 [2010년 01월 25일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