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본래 일이 없어 다만 낭군이 그 소리를 듣게 하고자 할 뿐. 頻呼小玉元無事 祇要檀郎認識聲 (변호소옥원무사 기요단낭인식성)
이것은 북송 시대에 활동한 오조법연의 유명한 게송이다. 선종사에서는 조주의 무자를 최초로 마음공부의 방식으로 채택한 선사로서 알려져 있다. 화상은 제자들에게 반드시 통과해야할 관문으로서 무자를 제시하였다. 무자를 참구할 때, 있다거나 혹은 없다거나 절대적인 무의 존재를 상정하거나 하지 말고 단지 무자를 참구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점은 당대와 송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당대의 문답은 송대에서는 하나의 참구해야 할 하나의 공부거리가 된다. 당대의 무자에 관한 문답이 일차적이라면, 이것을 의심하고 참구하는 송대의 방식은 메타적 관점이다.
“여러분은 조주화상의 무자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노승은 무자를 들어서 문득 쉰다. 그대들이 무자만을 투득한다면 천하의 사람들도 그대를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투득했다면 와서 말해보라. 나는 있다고 말하는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여기서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여기에 좋은 비유가 있다. 꿀 먹은 벙어리가 있다. 그는 달콤한 꿀을 먹었다. 그러나 벙어리인 까닭에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할까?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는 말할 수가 없다. 그저 웃을 것인가? 아니면 크게 고함을 질러댈까? 아니면 춤이라도 출까? 좋다. 무엇이라고 표현을 하든지, 그는 행복하다. 그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는 처음으로 연애하는 사람과 같다.
소옥은 몸종이다. 소옥을 계속적으로 부르는 것은 저 건너편에 신랑이 자기 소리를 듣기를 원한다. 그가 빨리 나타나길 바란다. 이 소리를 듣고 사랑하는 신랑이 내 앞에 나타나길 원한다. 그러면 나는 행복하고 반갑고 모든 근심이 사라지리라. 그래서 소옥을 부른다. 소옥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시킬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소옥을 부를 뿐이다.
마찬가지이다. 무자를 부르는 것은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혹은 무자에 대한 참구에 어떤 이유를 대기 시작하면 그것은 무자의 본래적인 의미가 아니다.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침묵하는 깊은 내면의 연인을 불러 깨우는 것일 뿐이다. 그 무자를 통해서 근원적인 본래의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본래의 자기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또한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무엇이라고 말해도 어긋난다. 그것은 얼굴이 없고, 꼬리가 없고, 모양과 형상이 없다. 그것은 언어적인 대상이 아니다. 언어적인 대상으로 형상화하는 순간에 그것은 어긋난다.
달콤한 꿀을 아무리 좋은 맛이라고 해도 직접 먹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것을 먹어본 사람은 설명이 필요가 없다. 먹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설명을 해주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반면에 그것을 철저하게 맛본 사람은 단 한 마디의 설명도 이미 어긋남을 알 것이다. 그래서 그냥 소옥을 부른다. 소옥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낭군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이것에 어떤 의미를 덧붙이는 순간에 그는 목숨을 잃는다. 그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무자는 다만 그냥 무자일 뿐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5호 [2010년 02월 09일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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