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화상은 어떤 사람이 법을 물으면, 그때마다 단지 손가락을 세우기만 했다. 구지화상이 외출하고 없을 때, 어떤 사람이 시봉하는 동자에게 “요즈음 화상께서는 어떤 법을 설하는가?”라고 묻자, 동자는 스승을 흉내 내어서 손가락을 세웠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듣고 구지화상은 칼로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아픔에 통곡하는 동자를 구지화상은 소리쳐 불렀다. 동자가 고개를 돌리자, 구지화상은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이 순간에 동자는 깨닫게 되었다.
구지(俱)화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조당집』에 의하면, 실제라는 비구니스님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자책을 하던 구지 스님은 천용화상을 뵙고 깨닫게 되었다. 천용화상은 그때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이것으로 구지화상은 크게 깨닫게 되었다. 이후로 구지화상은 법을 말할 때는 손가락을 세우기만 했다. 그러면서 “내가 천용화상에게 일지선(一指禪)을 얻는 뒤로 평생을 사용해도 다 사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여기서 일지선이란 단지 손가락을 세우는 일로 파악이 된다. 손가락을 세움으로써 일체의 진실을 몽땅 드러낸다. 그것은 뜰 앞의 잣나무와 같다. 한 마디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온통 자신을 드러낸 잣나무이다. 어떤 승려가 조주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다[庭前栢樹子].” 이 잣나무는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에 일구(一句)이다. 천지가 개벽하기 전에 일구가 있었다. 일체의 현상은 하나로 돌아간다. 이 하나가 일구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그런데 누군가 와서 뜰 앞의 잣나무를 뽑아버렸다. 어떤 버릇없는 사람이 그 일구를 불로 태워버렸다. 어떻게 할까? 구지화상의 어린 시봉은 흉내를 낸다. 이것은 그 속에 정신은 없고, 외적인 형식만 존재한다. 그래서 구지화상은 그것을 칼로 잘라버렸다. 동자는 통곡을 하면서 고통스런 상황에서 다시 세워진 손가락을 보고 깨닫게 된다.
이제 손가락은 그냥 손가락이 아니다. 그 이전의 손가락은 그냥 손가락이었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일상의 관념화된 손가락이었다. 그러나 관념이 무너져 내리면서 다시 만난 손가락은 전혀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닌 손가락이다. 이것은 상징이고 정신을 번쩍 깨어나게 하는 신호탄이다. 처음에는 손가락, 일구, 잣나무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을 잘라버리면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순간에 다시 손가락은 세워지고, 일구는 생생하게 현전하며 뜰 앞의 잣나무는 눈앞에 환해졌다.
선문답은 일종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런 정신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어린 시봉은 흉내를 내는 단계와 그것이 처절하게 부서지는 경험, 다시 눈앞에 놀랍게 현전하는 모습을 모두 경험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굳건해진 통찰과 깨달음은 흔들림이 없는 일상이 된다.
무문화상은 해설한다. 구지화상과 동자의 깨달음이 손가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손가락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가 없다. 손가락은 현재이고 삶이며 지금여기이다.
손가락과 깨달음을 분리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현재의 손가락이 없으면 깨달음은 관념에 떨어진다. 반대로 깨달음이 없는 손가락은 물질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손가락과 뜰 앞의 잣나무와 일구는 모두 달을 가리키는 표식이다. 달은 어떻게 존재한가? 어떻게 달을 직접 그대로 경험할 수가 있는가? 구지화상이 다시 손가락을 눈앞에 세운다.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7호 [2010년 02월 22일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