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승려가 조주화상에게 질문하였다. “저는 이제 막 총림에 들어왔습니다. 저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조주화상이 말씀하였다. “그대는 아침에 죽을 먹었는가?” “예, 죽을 먹었습니다.” 조주화상은 “그러면 발우를 씻게”라고 말하였다.
중국 선종에서 총림의 성립은 대체로 백장(749~814) 이후로 보고 있다. 청규는 대중이 모여서 정진을 할 때, 대중이 도량 내에서 지켜야할 역할과 생활의 방식을 규정하는 일종의 법규이다. 그 동안 선종은 율종 사찰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여 왔지만, 마조 이후로 선종은 크게 번창하면서 독자적인 도량과 대중이 형성되었기에 고유한 청규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마조의 선풍을 대표하는 언구로서 ‘평상심시도’라는 구절이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이지 별도로 특별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무엇이 평상심인가? 평범한 일상의 마음인데 구체적으로는 밥 먹고, 똥 싸는 일이다. 걷고 눕고, 일하는 평범한 일상이다. 그것이 그대로 도이지 별도의 가르침은 없다는 말이다. 이런 가르침은 북방과 남방이 서로 다르지 않다.
남방의 수행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초기경전은 『염처경』이다. 여기에 의하면, 일상의 걷고 눕고 하는 일상의 동작과 행위가 모두 명상의 일부가 된다. 걸을 때는 걷는 그 행위를 분명하게 알고, 숨을 쉴 때는 그 숨이 짧다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모두 명상이고 수행의 길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명상의 기술적인 용어는 사띠(正念)와 삼빠잔나(正知)이다.
사띠는 현재의 경험 내용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으로서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현재의 경험내용은 다름 아닌 일상의 평범한 마음이다. 이 마음에 대해서 시비, 선악의 판단이 없는 깊은 자각은 다시 그 존재에 대한 존재하는 그대로의 분명한 앎을 제공한다. 이것이 삼빠잔나이다. 이들은 현재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상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경험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이다. 판단 없는 자각이란 분별이 없다는 의미이고, 어떤 지적인 개념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경험에 의한 알아차림이지만, 열반이나 깨달음과 같은 그 결과를 의도하지 않는다.
현재의 경험에 대한 깊은 자각, 깨어있음이 바로 일상의 삶에서 구현되는 것, 이것이 평상심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에 기초한 분노나 어리석음의 일상적인 투쟁과 경쟁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심은 현재의 삶에 온통 집중된, 그렇지만 긴장이 없는 매우 자연스러운 깨어있음이다. 이것은 아침에 죽을 먹는 행위에서 드러나고, 발우를 씻는 과정에서 실현된다. 평상의 행위를 떠나서 명상수행의 도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처음 총림에 들어온 자나 수년을 총림에서 생활하는 수행자에게나 차이는 없다. 대개 종교는 별도의 특별한 가르침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없다. 현재에서 깨어있을 뿐이다. 아침에 죽을 먹었다면 당연히 발우를 씻어야 한다. 이것이 총림의 생활이고, 명상의 길이다.
어떤 이가 조주(778~897)화상을 방문하였다. 조주화상은 그에게 “여기를 온 적이 있던가?”를 묻고 “온 적이 있다”고 말하자, 조주화상은 “그러면 차를 마시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이에게 역시 같은 질문을 했다. 그 사람이 “온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 “그대도 차를 마시라”고 조주화상은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원주가 “어찌하여 온 적이 있는 사람이나 온 적이 없는 사람에게 모두 차를 마시라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자. 조주화상은 대답하였다. “원주, 그대도 차를 마시라.”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2호 [2010년 03월 30일 1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