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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산책] 51. 해중의 수레해체

slowdream 2010. 4. 16. 20:20

[선문답 산책] 51. 해중의 수레해체
논리적 연유 찾는 순간 ‘빗나간 화살’
존재하는 그대로 머무는 자체가 온전
기사등록일 [2010년 04월 06일 16:49 화요일]
 

월암화상이 어떤 승려에게 물었다. “해중이라는 수레 만드는 기술자가 수레 백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수레의 두 바퀴와 바퀴를 연결하는 축을 제거하였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무문관의 제8칙이다. 해중은 고대 사람으로 중국에서 처음으로 수레를 발명한 사람이다. 그는 수레를 백여 대를 만들었는데, 그는 두 바퀴와 그것을 연결하는 축을 제거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것을 논리적으로 어떤 연유를 찾게 되면 결코 대답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그는 매우 화가 나서 수레를 해체했다거나, 혹은 자신의 계획에 미치지 못해서 그랬다거나, 혹은 수레가 쓸모가 없게 되었기에 그랬다거나 하는 대답은 모두 본래의 과녁에서 빗나간 화살이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문답이 초기경전에 보인다. 어떤 이가 ‘무엇이 나인가’를 물어왔다. 그러자 부처님은 도리어 묻는다. 몸이 나인가? 느낌이 나인가? 생각이 나인가? 갈망이 나인가? 의식이 나인가? 이 생각이 나라면 이 생각이 일어나기 바로 이전의 생각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은 무상한 까닭에 나라고 말할 수가 말할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몸은 내가 아니다. 느낌은 내가 아니요, 갈망도 내가 아니요, 의식 또한 내가 아니다. 무엇이 나일까?

이런 유사한 문답이 또 있다. 『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는 밀린다왕에게 질문한다.  “왕이시여. 여기에 오실 때 무엇을 타고 오셨습니까?”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그러자 나가세나 존자는 왕에게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수레입니까? 바퀴가 수레입니까? 아니면 바퀴의 두 축이 수레입니까? 아니면 바퀴를 연결하는 살들입니까? 아니면 수레의 손잡이가 수레입니까? 이런 것들이 모두 수레가 아니라면 무엇이 수레입니까?”

 

이런 질문은 심리치료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묻는다.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 여기에 성남과 분노에 휩쓸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 묻는다. 무엇이 나인지? 성남의 감정이 나인가? 아니면 그가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나인가? 아니면 나를 존중해달라는 갈망이 나인가? 이런 것들이 모두가 내가 아니라면 무엇이 나인가?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대답을 할 수 없는 이곳에 무엇이 있는가? 차라리 대답할 수 없는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닌가? 대답하려고 무엇인가를 찾지 말고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그냥 물을 마시고, 걷고 산책하는 그대로 온전하지 않는가?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수레는 본래 없었고, 나란 일종의 가건물이고, 나의 분노는 인연을 좇아서 왔던 것이고, 그렇다면 무엇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인가? 무엇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집착이고, 언어이고, 상상이 아닌가?

 

그냥 봄이 오니, 비가 내리고 꽃이 핀 그대로 온전하지 않는가? 해중이 수레를 만들었던, 수레를 이제 해체하든지, 무엇이 문제인가? 그냥 그대로 두면 되지 않는가? 월암화상은 참 노파심이 절절하신 분이 아닌가? 본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에서 질문을 하고, 풍파를 일으키는 꼴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자꾸 집착하여 형상을 만들고 안주할 집을 구하여 그곳에 갇혀있으니, 물을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집인가라고. 지붕이 집인가? 기둥이 집인가? 이런 것이 집이 아니라면, 무엇이 집인가?

 

마찬가지로 그대의 감정이 당신이 아니고, 생각도 당신이 아니고, 당신의 갈망 역시 당신이 아니라면, 무엇이 당신인가? 당신은 지금 어디에 존재하는가?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3호 [2010년 04월 06일 1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