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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54. 조주의 감파

slowdream 2010. 5. 4. 10:14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54. 조주의 감파
어느 쪽 판단해도 극단에 떨어져
양극단 통합하는 길이 바로 중도
기사등록일 [2010년 04월 27일 10:09 화요일]
 

조주화상이 어떤 암자에 이르러 “계십니까?”라고 부르니, 암자의 주인이 주먹을 내밀었다. 조주화상은 ‘물이 얕아서 여기서 머물 수가 없군’하고 곧장 떠났다. 또 다른 암자에 이르러서 조주화상이 “계십니까?”라고 말하자, 그 암자의 주인 역시 주먹을 내밀었다. 조주화상은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자유자재로군!’ 하면서 예배를 하고 떠났다.

 


 

이것은 무문관의 제11칙이다. 무문화상은 두 암주가 똑같이 주먹을 내밀었는데, 조주화상은 어찌하여 한쪽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다른 한쪽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가?


긍정과 부정을 넘어서는 길은 없는가?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말한다. 양극단을 통합하는 하나의 길이 바로 중도이다. 선문답은 종종 이런 양극단을 제시하고 중도의 길을 묻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조주의 양면적인 평가를 초극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필자라면, 다시금 무문화상에게 주먹을 내밀 것이다. 무문화상의 다음 응답이 궁금하다.

 

평가는 언제나 언어적인 판단과 직결된다. 이를테면 그가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그가 나를 싫어하고 공격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불쾌하고 또한 불안하기도 한다. 여기서 핵심된 판단은 ‘그가 나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왜 그가 너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분명하게 나는 ‘그가 나를 째려보았기 때문이다’고 대답한다. 째려보다의 사전적인 의미는 ‘못마땅하여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다.’는 의미이다. 째려보는 것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가 있다. 과연 그는 나를 째려보았는가? 혹시 이런 판단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닌가 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가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구분해야할 점이 바로 구체적인 감각자료로서의 사실과 째려본다는 판단이다. 사실과 판단은 동일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일상에서 대부분 사실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것보다는, 언제나 평가하는 문화적인 체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문제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암자의 주인이 모두 동일하게 주먹을 내밀었다. 이것은 나를 공격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공부시키는 것인가? 전자라면 부정적인 평가이고, 후자라면 긍정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어느 쪽을 판단해도 중도가 아닌, 양극단에 떨어진 것이다. 한쪽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다른 한쪽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조주화상은 암자의 주인에게 두 번이나 시험을 당했다. 조주화상은 두 번 모두 언어적인 판단의 강물에 빠져버렸다. 그는 크게 어긋난 것이 된다.

 

조주화상은 중도의 길에서 미끄러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안에 등장하는 조주화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반대로 이 공안 속에 등장하는 조주화상은 후학들에게 공부거리를 제공하는 소재로서 등장한다고 보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혼돈이고, 논리적인 순환론으로 중도에서 벗어난 결과이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조주화상의 평가는 어떠한가?

 

아이구, 이제 그만! 조주의 물음과 암주의 주먹질을 모두 놓아버리자. 이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가던 길을 계속가자. 밥을 먹으러 가든지 아니면, 좋은 친구를 만나든지, 지금여기의 현실을 온전히 살자. 이곳에 전념하자. 오늘 나 역시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6호 [2010년 04월 27일 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