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덕산화상이 발우를 들고 공양간으로 내려왔다. 공양주를 맡고 있던 설봉이 이 모습을 보고 말하였다. “아니, 스님. 아직 공양 시간을 알리는 종도 치지 않았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요?” 그러자 덕산화상은 아무 말 없이 곧장 방장실로 되돌아갔다. 설봉이 사형인 암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니, 암두는 “훌륭한 덕산화상 같은 분도 아직 말후구(末後句)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나중에 이런 말을 덕산화상이 듣고 시자를 시켜서 암두를 오게 하였다.
덕산화상이 암두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군.” 그러자 암두가 조용히 그 뜻을 계시하였다. 다음 날 법좌에 올라 덕산화상이 법을 설하였는데, 평소와는 상당하게 달랐다. 이런 모습을 보고 승당으로 돌아온 암두는 손뼉을 치면서, 정말 기쁘게도 덕산스님께서 말후구를 알고계시군. 이제 천하의 어떤 사람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무문관의 제13칙이다. 원래의 제목은 ‘덕산탁발(德山托鉢)’로 되어 있다. 덕산화상이 거리로 탁발을 나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덕산화상께서 발우를 들고 공양간으로 오셨다는 의미이다. 남방전통에서는 탁발을 거리로 나가지만 북방전통은 모든 일상의 일이 총림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우를 들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덕산화상과 암두와의 관계가 더 드러나 있고, 그 중심된 어구는 말후구가 핵심요소가 아닌가 한다.
말후구(末後句)란 궁극적인 한 마디의 언구란 의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말(末)이란 마지막, 최종, 궁극이란 의미이다. 후(後)란 뒤에, 나중이란 뜻이니 비유하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일구를 말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추측으로 다가갈 수 없는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을 의미하니,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더욱 한 걸음 나아간 자리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한 걸음을 옮긴다. 높은 장대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곳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것, 이것이 말후구이다.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철저한 경험 끝에서 내뱉는 한 마디, 이것이 말후구이다. 이것을 보다 교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하면 이렇다.
불교수행의 핵심은 마음의 평정과 통찰이다. 평정은 곧 선정으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상태이다. 쉽게 말해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막다른 골목이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깊은 내적인 평정의 상태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물론 이런 경험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것으론 부족하다. 마음의 평정만 있다면 몽롱한 혼침이나 무기상태가 되는 경향이 높다. 여기에 깨어있음이 있어야 한다. 변화하는 일상에서 고요한 가운데 분명한 자각, 통찰이 요청된다. 단순하게 선정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로 선정을 이루고 그곳에서 분명하고 분명한 깨달음이 구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말후구이고, 백척간두 진일보이다. 자기 수행의 철저함에서 대중의 일상생활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곳에서 수행이 여실하게 이루어지는 것, 선정과 통찰이 함께 작용하는 곳, 이곳은 어디인가?
이곳은 설봉의 공양간이고, 덕산이 발우를 들고 방문한 그 길목이고, 암두가 손뼉을 치고 좋아하는 바로 그 자리가 그렇다. 별도의 자리가 없다. 이것을 떠나서 별도로 전해지는 가르침은 없다. 만약에 지금여기를 떠나서 별도의 가르침이 있고, 수행터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꼭두각시 인형놀음에 불과하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8호 [2010년 05월 11일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