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앙산화상이 꿈을 꾸었다. 화상은 미륵처소에 가서 세 번째 좌석에 앉았다. 그때 한 존자가 종을 치면서 앙산화상에게 설법을 할 차례라고 말했다. 앙산화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종를 치면서 말했다. “대승의 법은 사구를 떠났고 백비를 끊었다. 잘 들으라. 잘 들어라.”
앙산화상(807~853)은 위산영우의 법을 이었고, 위앙종을 확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앙산화상의 꿈속 설법은 1253년경에 간행된 『오등회원』 앙산장에 나온다. 나중에 앙산 스님이 잠에서 깨어나 이것을 위산화상에게 보고하니, 위산화상은 “성스런 지위에 들었다”고 평가했다. 이것을 전하는 『오등회원』은 앙산화상이 입적한 400년이 지난 이후에 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설법을 삼좌(三座)설법이라고 한다. 그것은 세 번째 좌석에 앉아있었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란 말이 상징하는 것은 분명하다. 곧 있음이 첫 번째 자리요, 없음이 두 번째 자리다. 세 번째는 있음과 없음의 분별을 떠난 제3의 자리란 의미이다. 모든 분별은 있음과 없음에서 비롯된다.
사구(四句)와 백비(百非)도 마찬가지이다. 사구(四句)는 긍정, 부정, ‘긍정과 부정’의 긍정, ‘긍정 혹은 부정’의 부정이다. 이것은 인간이 사유하는 네 가지 방식이다. 사구는 『중론(中論)』, 『구사론(俱舍論)』, 『성유식론(成唯識論)』등 불교의 중요한 논서에서 모두 거론하고 있다. 이런 분별로부터 벗어남이 바로 참된 진리임을 강조한다.
선종에서는 조사선의 원류가 된 마조(馬祖)의 문답에서도 발견된다. 어떤 젊은 승려가 마조화상에게 “사구와 백비를 떠나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의 의미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러자 마조화상은 “나는 오늘 조금 피곤하니 지장 스님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언어는 이미 사구이고 백비이다. 이것을 벗어나서 한마디를 하는 것은 역시 다시 사구와 백비에 떨어진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 오늘은 피곤하다. 백장 스님께 물어보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회피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회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답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 대답하면 사구와 백비에 떨어진다. 반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질문자를 회피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사구와 백비를 끊어내는 방식으로 임제화상은 사료간을 제시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사유방식의 사구백비를 내려놓은 방식이다. 첫째는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이다. 대상만을 남겨두고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을 뺏는 방식이다. 꽃의 색깔, 종소리, 바람의 감촉 등이 있지만 그것을 분별하는 인식은 없다. 그러면 사구백비를 벗어난다. 둘째는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이다. 대상을 빼앗고,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남겨둔다. 그는 그 무엇인가를 짝하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를 홀로 걷는다. 철저하게 혼자이다. 그렇지만 그는 전체가 된다. 그래서 사구백비를 끊어버렸다.
셋째는 인경공탈(人境共奪)이다. 사람과 대상을 모두 빼앗는다. 대상도 없고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도 없다. 마치 목석과 같지만 목석이 아닌 순수한 주의집중만이 있다. 깊은 선정의 상태인 까닭에 사구백비가 살아남지 못한다. 일체가 모두 깊은 삼매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인경공불탈(人境共不奪)이다. 대상도 있고 사람도 그대로 존재한다. 너와 나, 자연과 인간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인위적인 노력이 다 했다. 존재하는 그대로 그 자체로 충분하다. 덧칠하지 않는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9호 [2010년 08월 10일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