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승려가 남전화상에게 질문하였다.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는 법이 있습니까?” 그러자 남전화상은 “있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것이 사람에게 설하지 않는 법입니까?” 이에 남전화상은 말했다. “그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여기에 다시 무슨 말을 할까? 이것은 마음도 아니다. 부처도 아니다. 물건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가? 대답을 해보라. 대답하는 즉시 당신은 법을 설한 것이 된다. 설하지 않는 법은 설할 수가 없다. 그냥 미소를 지을 뿐이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은 그냥 침묵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것을 말하게 되면 옹색하여 지고, 거추장스럽고, 나중에는 산속에서 길을 잃는다. 무문화상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남전화상은 이 질문을 받고 집안의 재산을 다 털어내 버렸기에 가난한 빈털터리가 되었다. ‘친절도 오히려 덕을 손실한다. 말 없음이 오히려 큰 공덕이 된다. 설사 창창한 바다가 변한다고 해도, 끝내 그대를 위해서 말하지 않으리라.’
평소에 남전화상은 마음이 곧 그대로 부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중생심이 그대로 부처이다. 여기의 마음을 떠나서 별도로 부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고 말한다. 어느 것이 남전화상의 진심인가? 대답해 보라.
좋다. 긍정과 부정은 말놀음에 불과하니 좋다. 이것은 마음도 아니다. 사실 마음은 얼마나 아침저녁으로 바뀌는가? 끊임없이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 무엇을 붙잡을 수가 있을까? 이것은 부처도 아니다. 무엇이 부처인가? 말해보라.
만약 그 무엇이 부처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부처라는 형상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진실로 개념이고 지식이다. 개념은 현실이 아니고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허구이고 말만 있을 뿐이다. 어떤 공능도 없는 허깨비이다. 그러니 무엇을 부처라고 규정할 수가 없다.
이것은 물건도 아니다. 자꾸 한 물건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물건도 아니다. 한 물건이라 해도 역시 적절하지 못하다. 비유이고 은유이다. 비유는 그 자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니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그래서 설하지 않으리라.
어떻게 설할 수가 있겠는가? 설하는 즉시 곧 어긋나는데, 차라리 꿀 먹은 벙어리가 되리라. 이해가 된다. 부처님께서도 『능가경』에 따르면 45년간 한 번도 법을 설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았던가? 『선가귀감』에는 ‘부처께서 이것을 전할 수가 없는데, 가섭이 어떻게 전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니 무문화상이 설하지 않겠다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된다. 45년간에 설하신 팔만대장경은 그야말로 부질없는 거추장스런 언구가 되었다. 그래도 어떤 필요에 의해서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는가?
눈을 감아 보라. 그리고 소리를 들어보라. 아니 의도를 내지 말고 단지 소리에만 주의를 응시하여 보라. 그러면 이곳에는 들려오는 매미소리만 존재할 뿐이다. 이곳에는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고, 물건도 없다. 그러면 무엇이 있는가? 대답은 이렇다. 오직 매미소리가 들려오고 있다고. 하지만 매미소리라는 분별도 하지 않으면 어떤가?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대답하여 보라.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0호 [2010년 08월 17일 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