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화상에게 어떤 승려가 ‘무엇이 부처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마조화상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고 대답하였다.
중국 선종사에서 실질적인 선종의 부흥은 바로 마조화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자주 하는 질문이 ‘무엇이 부처인가’하는 점이다. 부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불교의 종교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부처를 역사적인 인물로만 이해한다면 현재에 부처가 없다. 그분은 과거의 인물로서 이미 가셨다. 부처를 불상이나 그림으로 이해하면, 종교적인 상징으로서 일종의 의식이다. 상징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경우에는 곧 그것은 불태울 수가 있는 물질에 불과하다.
그러니 당연히 ‘무엇이 부처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부처에 대한 많은 견해가 있어왔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이해한 부처는 무엇인가? 특히 나의 실존적인 관점에서 부처는 어떤 의미인가? 이점에 대한 마조화상의 응답이 바로 ‘마음이 곧 부처이다’는 명구이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니, 불로 태울 수가 없다. 이것은 현재에 작용하는 것인 관계로 과거가 아니다. 더구나 매우 주체적인 관점에서 부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데, 이 마음은 어떤 종류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우선적으로 번뇌와 선악으로 물든 마음을 부처라고 하기에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거짓말하고 속이는 마음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또 하나의 지식으로 이해될 수가 있다. 처음에는 신선하고 살아있는 언구였다. 그러나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애창되면서, 다시 관념화에 떨어지고, 형식화되는 경향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면 다시 묻는다. 무엇이 부처인가? 이것은 마음도 아니다. 부처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다시 발문하게 된다. 여기에 참고할 좋은 사례가 있다.
대매 스님은 마음이 곧 그대로 부처라는 가르침을 마조화상에게 듣고서 깨달음을 얻었다. 어떤 승려가 대매화상에게 물었다. “마조화상에게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스승께서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소.” 그러자 그 승려는 대답하였다. “요사이 스승께서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때 대매화상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여전히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그 승려는 마조화상에게 돌아가서 이런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마조화상은 ‘매실이 익었군’하고 대답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 이런 대립된 갈등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이들의 모순과 갈등을 일거에 해소시킬 수 있는 방편이 있다. 이게 무엇일까? 어떤 이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긍정을 표현하고, 마음도 아니라는 것은 곧 부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좋다. 긍정과 부정을 넘어서는 한 마디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답을 하는 것이다. 긍정과 부정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단지 언어적인 표현, 묘사에 불과하다. 실질적인 내용, 그 진실을 말하면 된다.
이것을 부처라고 해도 좋고, 마음이라고 해도 좋고, 한 물건이라고 해도 좋다. 이것을 마음이 아니라고 해도 좋고, 이것은 부처가 아니라고 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이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긍정과 부정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남겨진 한 마디를 해보면, 어떨까? 지금 창밖으로 비가 온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2호 [2010년 08월 31일 1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