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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산책] 68. 마조의 즉심시불

slowdream 2010. 8. 29. 17:57

[선문답 산책] 68. 마조의 즉심시불
생멸심은 늘 부족함 느끼는 소유방식
진여심은 존재 그대로 수용하는 방식
기사등록일 [2010년 08월 25일 10:08 수요일]
 

대매스님이 마조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조화상은 ‘마음이 곧 부처이다(卽心是佛)’고 대답하였다. 무문화상은 말하였다. 만약에 능히 곧장 깨닫는다면, 부처의 옷을 입고, 부처의 밥을 먹으며, 부처의 말을 하고, 부처의 행을 할 것이다. 이것이 곧 부처이다.

 


 

부처란 곧 이 마음이다. 이때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어떤 마음이기에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란 말인가? 일단 마음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 물든 마음과 물들지 않는 마음이다. 물든 마음을 생멸심(生滅心)이라 하고, 물들지 않는 마음을 진여심(眞如心)이라고 하자.

 

물든 마음이란 감정, 생각, 갈망에 의해서 옳음과 그름, 예쁨과 미움, 착함과 착하지 않음 등으로 물든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불편한 고통을 경험한다. 이것은 소유의 방식이다. 이 경우 현재는 늘 불만족으로 경험된다. 여전히 무엇인가 부족, 결핍감을 호소한다. 만족할 날이 없다. 항상 불만을 터뜨린다. 그는 많이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배가 고프다.

 

반면에 물들지 않는 마음은 존재방식을 말한다. 존재방식은 어떤 의도를 갖지 않는 존재 그대로 수용하고 허용하는 방식이다. 단지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이것으로 족하다. 별도로 무엇인가를 첨가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상에서 행하는 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마음이다. 아무런 특별함이 없다. 이 마음이 곧바로 부처의 마음이다. 이것으로 걷고, 이 마음으로 옷을 입고, 이 마음으로 밥을 먹고, 이 마음으로 말한다.

 

그렇지만 이 마음을 행하기는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다. 어느 사이에 벌써 분별이 들어가고, 상대방의 의도를 해석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를 한다. 경쟁하고 우열을 나눈다. 그럼으로써 극히 단순한 현재의 마음, 존재하는 그대로의 마음을 놓치고 산속에서 길을 헤맨다. 어느 듯 소유방식의 마음으로 변환되어 있다. 한 번 소유방식으로 변환되면, 다시 존재양식으로 전환되기 참 어렵다. 왜냐하면 자꾸 분별하고 평가하고 상대를 자신의 방식으로 자꾸 통제하려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런 좋은 사례가 있다.

 

어떤 승려가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임제화상에게 물었다. 그러자 임제화상은 “만약에 어떤 뜻이 있다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끊임없이 분별하는 질문자는 “뜻이 없다면 어떻게 혜가가 달마의 법을 얻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임제화상은 “뜻이 없는 것으로 법을 얻은 것이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 승려는 다시 물었다. “뜻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임제화상은 말했다.

 

“너는 끊임없이 분별만 한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자신의 머리를 가지고, 다시 머리를 찾는 꼴을 면할 수가 없다. 단지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할 뿐, 별도로 구하지 않으면 된다. 몸과 마음이 그대로 조사이고 부처임을 알아서 더 이상 구하는 마음이 없어야 득법(得法)하는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은 부족함이 없다.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 이대로가 중생이고, 이대로가 부처이고, 이대로가 조사이다. 별도의 공력을 빌려서 조사와 부처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키가 크면 키가 큰 그대로, 키가 작으면 키가 작은 그대로 부처이고 조사이다. 부처를 중생으로 만들지 않고 중생을 부처로 만들지 않는다. 들판에 나가면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그대로가 온전하지 않는가? 별도로 다른 가르침은 없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1호 [2010년 08월 25일 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