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승려가 “광명이 조용히 항하사를 두루 비추니”라고 말하는데, 운문화상이 “아니, 그것은 장졸수재의 게송이 아닌가?’”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승려는 “예”라고 대답하였다. 운문화상은 말에 “떨어졌군” 했다. 나중에 황용사심 화상이 “자, 말해보라. 이 승려가 말에 떨어진 자리는 어디인가?” 질문하였다.
여기서 장졸수재는 석상화상과의 문답에서 깨닫는 바가 있어서 게송을 지었다. 그의 전체 게송은 다음과 같다.
‘광명이 조용히 항하사를 비추니 /범부와 성인을 비롯한 영혼을 지닌 일체가 나와 같은 집안이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 전체가 드러나고/ 감각기관이 조금만 움직여도 구름에 가림을 받는다./ 번뇌를 끊어 없애려 하는 것이 더욱 병을 깊게 하고 /진여를 향해 나아가는 것도 삿된 것이다./ 세상의 인연에 따르고 수순함에 걸림이 없으니/ 열반과 생사가 허공의 꽃과 같다.’
광명이 일체를 비추니, 범부와 성인을 비롯된 모든 생명체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그렇다. 불성, 영성, 그 본성에서 차별이 없다. 하지만 생각을 일으키고 감각기관에 끌려가면 그곳에서 성인이다, 범부이다 차별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가? 번뇌를 끊어서 없애려는 것은 병을 더욱 깊게 한다. 왜냐하면 끊고 없애려는 의도가 바로 병인 까닭이다. 진여에로 나가는 것이 오히려 삿된 길인 것은 이미 광명은 일체를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세상의 인연에 수순하여 걸림이 없는 것, 그러니 열반이니 생사니 하는 야단법석은 나완 무관하다.
이것이 장졸의 게송이다. 여기서 핵심은 첫 행, ‘조용히 광명이 일체를 비춘다’는 구절이다. 이때 옆에 있던 운문화상이 “그것은 장졸수재의 게송이 아닌가?” 묻자, 그 승려는 “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운문화상은 “말에 떨어졌다”고 평한다. 그러자 송대의 오조법연 화상이 날카로운 고봉처럼 “어느 곳이 말에 떨어진 곳인가?”를 묻는다. 무문화상은 이곳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인간과 천상에서 진정한 스승이 된다고 말한다.
물론 스승이 되지 않아도 좋다. 그런데 “그것은 장졸의 게송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예” 대답하는 승려의 허물은 무엇인가? 말에 떨어졌다고 한다. 왜 그런가? 여기서 문답의 핵심 언구는 바로 ‘그것은’에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대답하면 된다. 지시대명사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러면 문제의 핵심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은 ‘게송’인가? 아니면 조용히 일체를 비추는 ‘광명’인가?
첫 번째 게송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게송의 작자를 묻는 질문인 까닭에 장졸수재로 대답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 위의 게송의 작자는 분명하게 장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항하사 일체를 널리 비추는 ‘광명’의 의미로서 질문한 내용이라면, 정말 ‘말에 떨어진’ 것이다. 이 ‘광명’이 장졸수재의 게송일 수는 없다.
세상을 널리 비추는 ‘광명’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도 아니요, 더구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멀어진다. 내가 광명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광명이 내게로 다가와서 드러난다. 그러니, 열반과 생사가 존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과 같다. 열반이니 생사는 광명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데, 그런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내속에 보석처럼 빛나는 광명을 체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숨을 멈춘 다음에 들이 마시고, 천천히 내쉬면서 지켜보라. 그곳에 광명이 있는지를 확인하여 보라.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4호 [2010년 09월 14일 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