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산화상은 백장화상의 문하에 있을 때, 공양담당을 맡고 있었다. 그때 백장화상은 대위산의 주지를 선발하려고 하였다. 수좌를 청하여 대중에게 알리고 자격이 있는 자를 보낼 작정이었다. 백장화상은 물병을 바닥에 놓고 물었다. “이것을 물병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수좌가 말했다. “그렇다고 나무토막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백장화상이 이번에는 위산에게 같은 질문하였다. 그러자 위산은 일어나서 발로 물병을 차버리고 나갔다. 그러자 백장이 웃으면서 “수좌는 위산에게 졌다.” 이로 말미암아 위산에게 명하여 대위산에서 법을 펼치도록 하였다.
여기의 공안은 매우 간단하다. 물병을 차버리고 나가는 것, 통쾌하다. 이것이면 되었다. 다시 무엇을 여기에 첨가할 것인가? 그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제 가을이다. 그 무더운 여름날이 지나고 푸르고 푸른 하늘이 눈앞에 있다.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절로 맑아진다. 계곡에 흐르는 물을 다 마신 것처럼,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 얼굴을 스치고 저 멀리 날아가는 산새와 같다. 『숫타니파타』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출가를 왜 했는가? 저 산과 들판은 넓고 광활하다. 바람처럼 온갖 장애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집안은 어떤가? 옹졸하고 비좁고 이것저것 잡동사니가 많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어느 참에 가득 쌓여 있다. 그래서 나는 출가했노라고.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가? 그것은 분별적인 언어이다. 우리는 언어에 갇혀 있다.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백장화상은 물통을 앞에 세워놓고, 이것을 물통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대답하려 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물통입니다. 혹은 그것은 물통이 아니고, 바로 나무토막입니다. 아니면 수좌처럼, 그것을 나무토막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답들은 모두 언어적인 분별이다. 이런 분별은 문화적인 습관이다. 의사소통에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분별은 심리적인 영역에 속한다. 심리적 현상은 언어적인 사고와 감정과 갈망 등으로 구성된다. 이런 현상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부분이다. 이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것을 잘 하지 못하면 적응하는데 심한 장애를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언어적인 분별은 영적인 성장에 방해가 된다. 영성, 혹은 불성은 언어적인 심리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언어적인 사유작용이 멈추는 곳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물병의 문제가 아니다. 앞에 놓인 이것은 물병이라 불러도 좋고, 나무토막이라 불러도 좋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이런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본질,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앞에 놓인 물통에 집착하면, 자기의 본성을 상실하게 된다. 푸른 가을 하늘을 언어적인 사유작용이 구름처럼 본래의 마음을 은폐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물병은 발로 차버리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물병을 찬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문화적이고 집단적인 언어적인 분별을 차고 나가는 상징이다.
이제 위산화상은 이사를 가야한다. 이 많은 물건을 가지고 갈수는 없다. 그동안 백장문하에서 잘 지냈다. 식사담당하면서 그 많은 물통도 관리했고, 대중의 식사를 위해서 많은 물건도 구입했다. 집안에 물건들이 가득하다. 그런 것 다 내려놓고, 이 가을엔 다시 떠나야 한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5호 [2010년 09월 27일 1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