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화상이 죽비를 들고 대중에게 보이면서, “그대들은 이것을 어떻게 부르겠는가? 죽비라고 부르면 모양에 집착한 것이요, 죽비가 아니라면 사실에 위배된다. 자, 말해보라.”
선문답의 대부분 갈등대화이다. 대화 속에서는 모순과 갈등이 함축되어 있다. 한쪽은 이것이 옳다하고, 다른 쪽은 저것이 옳다고 말한다. 이러한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를테면 시위하는 시민을 경찰관이 진압하는 일은 갈등이슈이다. 경찰관은 보편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제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경찰관이 과도하게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갈등대화 속에서 학생들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어떤 학생은 경찰관의 태도를 지지할 것이고, 다른 학생은 시민의 입장을 옹호할 것이다.
이런 갈등적 대화의 사례를 통해서 학생들은 민주적인 대화라는 새로운 타협과 문제해결의 방법을 배운다. 이것이 변증법적인 과정이다. 그곳에는 모순과 대립이 있다. 이런 대립에서 양자를 모두 극복하는 새로운 개념이 나타난다. 이것이 종합으로서 진테제(synthese)이다. 종합은 새로운 개념으로서 민주적인 대화이고, 이런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말한다. 경찰과 시민이 서로 대화를 하고 그 대화를 통해 협상을 이루고, 서로가 용인되는 적절한 행동의 범위를 확정함으로써 갈등은 해소가 된다.
그런데 선문답에서도 이렇게 해결이 될까? 선문답의 갈등은 개념에서 온다. 이런 개념이 바로 갈등의 주된 요인이다. 곧 죽비라는 개념을 보자. 죽비는 대중생활에서 행동을 지시하는 일종의 신호를 보내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도구이다. 죽비의 기능은 딱딱 어떤 행동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것을 모두 죽비로 알고 있다. 그런데 수산화상은 죽비를 들고 대중에게 보이면서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른가를 물어본다. 당연히 죽비라고 대중은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죽비라는 모양과 기능에 집착한 결과라고 말한다.
사회적인 언어적 기능의 이름이지, 궁극적인 본질(眞諦)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일반적인 이름, 사회적인 관습(俗諦)에 위배가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갈등대화는 선어록에 자주 발견된다. 종교적으로 궁극적인 관심에로 나아가면, 관습적인 측면이 소홀하게 된다. 반대로 관습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궁극적인 관심에서 벗어난다. 이런 갈등에서 어떤 활로가 있을까?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어떤 승려가 앞으로 나와서 수산화상이 들고 있는 물건, 죽비를 빼앗아 내던지면서 “이것이 무슨 물건입니까?” 라고 했다. 그러자 수산화상은 “눈먼 녀석”이라고 한 마디를 했다. 그러자 그 승려는 깨닫고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 왜 그 승려는 눈먼 녀석인가? 그리고 어찌하여 그 승려는 절을 했다는 것인가? 무문화상은 이렇게 논평한다. ‘죽비를 들고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명령을 행하니, 집착과 위배가 교차하여 내달린다. 부처와 조사도 여기서 목숨을 구걸한다.’ 그렇다. 궁극적 이치와 관습적 행위 속에서, 이들의 갈등 속에서 목숨을 유지하기가 참 어렵다. 궁극에 나아가는 듯하지만, 어느 참에 다시 관습과 형식에 묶여있다.
아, 친구여. 이제 그만 죽비는 잊고, 수산화상이 들고 있는 죽비는 계속 들고 있도록 하고, 그만 여기로 돌아오라. 나는 지금 창문을 열고 있다. 높은 하늘에 흰 구름이 흘러가고, 내 아랫배에 깊은 숨결이 느껴진다. 일상의 논리적인 상식이 붕괴된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6호 [2010년 10월 04일 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