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신심명(信心銘)·증도가(證道歌)

24. 무위법의 뜻

slowdream 2011. 9. 7. 04:22
24. 무위법의 뜻
 
부처님이 설한 무위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 입장에서 자동적으로 움직인다는 뜻
 

우리는 오랫동안 유교적 사고방식에 물들어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여 왔다. 의미 있는 삶은 곧 가치 있는 삶에 해당한다. 무가치한 삶은 아무런 값어치가 나지 않는 삶으로 일반적으로 간주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너무도 깊숙이 박혀 있어서 이것을 없애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또 소유라고 하면, 경제적 의미만 생각하고 정신적 소유를 배제하거나 망각한다. 그러나 육조 혜능대사가 ‘단경’에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아라(不思善 不思惡)’라고 한 말의 의미는 선악도 다 가치의 소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그토록 강조하는 선행의 소유와 악행의 배제는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적 가치의 집착을 뜻한다. 열렬한 선의 봉행은 맹렬한 악의 배척과 마찬가지로 집착의 병을 불러 온다. 불교의 수행에서 강렬한 쾌락주의에 못지않게 지독한 금욕주의도 정신적 가치의 소유병에 걸린 현상이다.


정신적 가치의 소유나 물질적 가치(가격)의 탐욕이나 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까닭은 그것들이 다 무위법이 아니라, 유위법의 틀을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법은 무위법의 실상이다. 흔히 무위법이라 하면 마치 아무 것도 안하는 행위의 포기인 양 착각하는 이들이 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불법이 말하는 무위법은 타동사적인 행위의 종말을 말하지, 결코 자동사적인 행위의 종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타동사적인 행위의 종말은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여 어떤 작용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여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마음이 그 어떤 것을 소유하려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그런 태도는 정신적 가치든 물질적 가치든 상관없다. 이미 마음이 그 가치에 의하여 흔들림을 받았다. 마음이 어떤 외적 가치에 흔들릴 때에, 마음의 육근(六根=眼耳鼻舌身意根)이 자기의 여래장 속의 마니주(여의주)를 사용하지 못하고, 다만 외적인 탐욕에 지배를 받게 된다.


영가대사가 ‘영가집’에서 밝힌 ‘여섯 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이요, 한 덩이 둥근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의 의미는 마음이 진실로 무위법에 의거해서 자동사적으로 움직인 것이요, 타동사적인 운동을 발양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마음이 자동사적으로 고요하거나 움직인 것은 타동사적으로 타율적으로 다른 것에 의하여 흔들리는 것과 달라서, 임제(臨濟)선사가 ‘임제록(臨濟錄)’에서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곳곳의 상황에 따라 주인이 됨)’의 태도를 일컫는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파하신 무위법은 어떤 상황 아래서도 주인의 입장에서 외부의 손님의 현존여부와 무관하게 스스로 자동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이지, 결코 다른 이들의 입김으로 영향을 받아서 마음이 지배를 당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무위법은 곧바로 주인법의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즉 무위법은 자동사적으로 마음이 주인으로서 고요하거나 움직인다는 의미다. 무위의 주인법에서 보면, 영가대사가 읊은 것처럼 마음이 고요할 때에 마음이 공이기도 하고, 마음에 무엇이 나타날 때에 마음은 이미 공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을 주관 없이 원만하게 비추는 마음의 빛은 색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색이 아닌 공으로 여겨지기도 하다는 것이다.

 

▲김형효 교수

이 모든 말은 ‘반야심경’이 말하는 ‘공즉시색(空卽是色)’과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상징한다. 여기서 영가대사는 이 무위의 주인의 경지에서 ‘오안(五眼=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이 깨끗해져서 오력(五力=信力/精進力/念力/定力/慧力)을 얻게 되고, 이것은 증득해야 알 뿐이지, 헤아리기 어렵도다’라고 술회하였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