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붓다의 가르침, 연기법

slowdream 2022. 7. 11. 23:39

 

길을 가득 메운 채 사람들이 뛰어가고 있습니다. 무리의 앞과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기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한 사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갛게 달아오른 낯빛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이죠.

“왜 뛰고 있는지 궁금해서...”

나도 그 사내도, 우리 둘 주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앞을 바라본 채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대꾸합니다.

“그쪽에서 뛰고 있어서 따라 뛰고 있는 겁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 그것들과의 관계맺음, 나를 이루는 육체와 정신, 삶의 궁극적 의미, 세계의 발생과 소멸...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현상을 꿰뚫고 이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치, 원리, 법칙. 그것을 진리라 합니다. 진리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보편성, 일반성, 불변성.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영원히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심리 등등의 분야에도 나름의 법칙이자 원리가 존재합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걸맞는 새로운 법칙이 등장하고 낡은 법칙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불변의 궁극적인 진리만이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만능key라 할 수 있겠죠.

 

역사 이래로 동서와 고금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많은 노력이 기울어졌습니다. 철학, 자연과학, 종교 등이 고유의 영역에서 혹은 경계를 뛰어넘으며 사유와 경험의 지평을 넓혀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두들 이것만이 진리라고 단호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진리를 좇는 많은 이들의 눈을 어지럽히고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리를, 귀를, 코를, 배를 제각기 더듬으면서 이것이 코끼리라 확신하는 장님들의 비유가 적당하겠죠.

 

근현대 철학과 의학, 생물학, 심리학, 천체물리학과 양자역학의 놀라운 발전에 힘입어 인간의 사유와 경험의 세계는 놀라우리만치 확장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이 인간의 내면과 밖으로 점점 더 확장되면서, 유신론적 종교는 철학에게, 철학은 과학에게 점차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현대는 과학과 과학적방법론이 모든 분야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요. 인간의 정신세계는 심리학과 뇌과학이, 물질세계는 물리학과 생화학이 큰 성과를 올리면서 상대적으로 종교와 철학의 입지를 좁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기체인 인간으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와 정신의 복합체인 ‘나’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으며,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생로병사의 비밀을 좇다 보면 마침내 만나는, 끝내 만나야만 하는 한 분이 있습니다. 2,500여년 전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한 그 분, 붓다입니다.

 

붓다께서 깨달은 진리인 ‘연기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굳이 불교에 귀의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학문적인, 지적인 태도에서 접근해도 좋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서양의 근현대철학자인 니체 칸트 흄 쇼펜하우어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들뢰즈의 사유체계, 동양의 주역과 노장자철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인공지능과 뇌과학 등의 이해에 연기법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귀띔해 드립니다. 현대의 구조주의, 해체철학과 자연과학이 수천년 전의 사유와 경험에 접근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요.

 

 

유무와 생멸의 의존적 상호발생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이 사라진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인과법, 상호의존적 발생, 비선형적 상호인과율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있음’과 ‘없음’, ‘일어남’과 ‘사라짐’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고정불변의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에 서로 의지해서 있고 없으며 발생하고 소멸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有無와 生滅의 현상 속살에 새겨진 무늬라고 할까요. 모든 존재, 사물과 사건, 요컨대 사실, 현상을 가능케 하는 조건, 원인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생각보다 단순하고 싱거운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붓다께서 가르침을 펼쳤던 2,50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實體論과 唯物論, 有神論을 보세요. 연기법이 참으로 소박하고 단순하고 수준이 낮아서 그들이 무시하고 배척한 것이 아니라, 연기법의 심오하고 미묘함, 오직 지혜로운 이들만이 꿰뚫어볼 수 있는 경지인 까닭에 차마 가까이 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충실한 불교 신자들마저도 연기법을 온전히 이해한다고는 장담하기 무척 어려운 현실이니까요. 붓다의 제자 가운데 가장 지혜로웠다고 평가받는 사리붓따마저도 연기법에 대해서 통달했다고 섣불리 말하지 말라고 붓다께 꾸지람을 들었을 정도입니다.

 

동시대 상당한 사유체계를 갖춘 그리스나 중국이 아닌 인도에 붓다께서 출생한 까닭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깊이 있는 사유체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행법 또한 널리 자리잡고 있었기에 인도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타당합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기 전, 붓다의 태도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삶이,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야 하고 끝내 죽어야만 하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고통’이라고 직관했습니다. 왕족으로서 온갖 향락을 누린 그는 행복 속에 감추어진 고통을 꿰뚫어보고서,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이 전개되는 원인을 찾기 위해 29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그리고 6년만에 정등각을 이루고 여래, 아라한, 붓다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인 ‘연기법’은 붓다께서 고통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 원인을 찾아낸 과정 그 자체입니다. 여기까지는 사변철학과 과학의 몫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나아갑니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뿌리뽑고 소멸할 수 있는 방법이자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리하여 큰 가르침으로, 더없이 위대한 스승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었지요.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한 법은 세 가지 보편적 특성을 지닙니다. 이를 ‘三法印’이라 지칭합니다. 諸行無常, 諸行皆苦, 諸法無我. 영원하지 않고 변하며, 그렇기에 불만족스럽고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우며, 그러한 상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고정된 실체라고 할 무엇이 없다. 물론 실체가 없다뿐이지 법은 실재합니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한 삶을 단위로 하는 경험적 개별자인 ‘나’를 현실에서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현실의 나는 실체가 아닌, 他者와 변별되는 對自로서의 나일 따름입니다.

 

연기법은 세포 단위의 생명체에서부터 물질의 최소 단위, 인간의 심리, 더 나아가 저 광대한 우주에 편재하는 모든 존재들, 갖가지 사회현상들에게까지 두루 미칩니다. 보편적 진리이니까요. 하지만 붓다께서 유기체인 인간 삶의 현실에 초점을 맞춘 까닭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개미도 코끼리도 아니고 나무와 바위도 아닌, 지적 생명체인 인간이 직면한 지금여기에서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죠. 생명의 기원이나, 우주 발생의 처음과 끝 등의 물음에는 붓다께서 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6신통(신족통, 신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체득한 터라 의문을 해결해줄 수는 있지만, 발등에 떨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기에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붓다께서는 형이상학적인 지적 탐구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번뇌의 소멸과 해탈, 열반을 성취하는 데 큰 이득이 없다는 까닭에서입니다. 언어와 사유가 삶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몫을 하지만 또한 그 한계, 그릇된 견해와 망상의 확대재생산을 경계한 것이죠. ‘독화살의 비유’가 이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을 四聖諦라 합니다. 苦, 集, 滅, 道.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 흔히 일컬어집니다. 이는 번역상의 오류입니다. 진리가 어찌 네 가지이며, 게다가 고통이 성스러운 진리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네 가지 성스러운 진실로 이해해야 합니다. 진리는 오로지 연기법일 따름이며, 진리의 눈으로 통찰하니 존재하는 법들의 실상이 무상, 고, 무아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의 궁극적 귀결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나아가 그 원인을 제거하는 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내주신 겁니다. 사성제로서 우리는 진리의 이해에 멈추지 않고, 현상적이고 불완전한 행복에 감추어진 고통의 정체와 그것을 온전히 제거함으로써 완전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붓다의 진리인 연기법은 육체와 정신의 복합체인 한 인간의 생성과 소멸, 지금여기에서 한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 고통으로 귀결되고야마는 한 삶과 한 생각의 전개과정을 명확하게 밝혀줍니다.

 

無明(<->煩惱) - 行 - 識 <- >名色 - 六入 - 觸 - 受 - 愛 - 取 - 有 - 生 - 老死. 愁悲苦憂惱(슬픔.비탄.고통.고뇌.좌절)

 

이것은 12지연기라 합니다. 연기는 설법의 대상과 내용에 따라 2지부터 12지까지 다양하게 설해지고 있지만, 삶과 고통의 전개를 전반적으로 조망하기에는 12지연기가 적절하며, 그런 까닭에 가장 많이 경전에 기록되어 있지요.

 

 

無明 <-> 煩惱

 

12지연기의 첫머리에는 무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명의 조건. 원인으로 번뇌가 자리합니다. 이 둘은 상호작용합니다. 식과 명색도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강조합니다. 물론 연기법이 ‘의존적 상호발생’이기에 무명과 행, 행과 식도 상호작용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두 쌍의 인과, 연기를 강조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무명 이전의 조건을, 제 1원인을 탐구하지 말라는, 사유의 질곡인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식과 명색의 경우는, 무명과 행이 생략되고 곧잘 설해지는 10지연기에서 식 이전으로 소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정신과 육체의 복합체인 인간존재를 가리키기도 하기에 둘을 엮어놓은 것이죠.

 

무명은 근본적 무지를 가리킵니다. ‘근본적’이라 함은 결국 진리에의 접근을 어렵게 하기 때문에 연기법도 3법인도 사성제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러한 무명의 발생조건이 번뇌입니다. ‘흘러들어와 오염시킨다’는 의미에서의 번뇌는 3가지로 설명됩니다. 慾漏, 有漏, 無明漏. 감각적 쾌락에의 욕망, 존재에의 욕망, 무지. 이 셋은 불교의 세계관인 욕계, 색계, 무색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젖어 있으면 저열한 욕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존재의 욕망에 속박되어 있으면 욕계보다는 수승하지만 여전히 생멸을 거듭하며 고통을 받아야 하는 색계와 무색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근본무지인 무명이 조금씩 벗겨지는 정도에 따라 욕망이 흐릿해지면서, 욕계와 색계, 무색계인 중생계에서 마침내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번뇌는, 지혜를 무력하게 만들고 마음을 오염시키는 장본인입니다. 또한 무지는 번뇌를 확대재생산 시킵니다. 욕망과 무지를 뿌리뽑아야 결국 고통이 제거됨을, 사성제에서 고통의 원인인 집성제를 얘기하고 있죠.

 

 

 

행은 ‘형성작용 또는 그러한 작용을 지닌 법’입니다. 모든 법은 연기하기에 조건으로서의 작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형성된 법뿐 아니라, 형성력이 있는 법, 형성작용 자체로도 이해해야 합니다. 존재의 측면에서 보느냐, 작용의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법에 대한 이해는 좀더 폭넓어집니다. 철학에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하지만, 불교에서는 인식과 동떨어진 존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어떤 법이든 발생의 조건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꽃이 피기까지, 구름에서 빗방울이 생성되기까지, 남녀간에 사랑이 싹트기까지 물리적인 심리적인 다양한 조건이 절묘하게 어우러져야 합니다. 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중요한 조건, 원인을 꼽는 것이죠. 무명에서 행이 발생한다고 하여 무명만이 유일한 행의 조건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무명의 조건인 번뇌 또한 행의 조건입니다. 행의 결과인 식 또한 행의 발생의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연기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뒤바뀌어 결과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feedback 즉 유기적인 되먹임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연기법이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또한 유기적인 구조를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의 구체적 예로 3가지를 경전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身-들숨. 날숨, 口-일으킨 생각. 살펴봄, 心-受와 想

들숨과 날숨이 몸을 형성시키는 법이고, 말은 생각을 일으킴과 일어난 생각을 살펴보는 행위가 형성시키는 것이며, 마음은 감수와 인지로 형성됩니다. 몸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조건인 법으로는 호흡과 혈액, 음식 등이 있지만, 호흡을 꼽은 것은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조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의 형성조건은 사유입니다. 생각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이죠. 하지만 언어 없이 사유가 가능할까요. 언어의 구조는 사유의 구조와 같습니다. 사유는 언어로써 내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언어는 사유의 내용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정신세계를 다루는 현대의 분석철학이 언어의 구조를 탐구하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마음과 감수, 인지의 관계입니다. 대승불교와 상좌부(아비담마)불교에서는 마음이 감수와 인지를 발생시키는 조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인 五蘊에서 육체인 色을 제외한 정신적 요소로 受(감수), 想(인지), 行(형성), 識(의식)이 있지만, 마음은 없습니다.

 

이 마음을 놓고서 2천년이 넘도록 깊은 오해가 자리했습니다. 마음이 감수와 인지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의식을 마음인 心王, 감수와 인지, 형성을 心所(마음의 작용)으로 정리해버린 것이죠. 마음을 초월적 실체로 여기는 오해와 착각은 너무도 뿌리 깊어서 근절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승에서는 마음을 붓을 쥔 화공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붓다께서는 다양한 그림으로 비유했습니다. 중생심, 주인공, 참나, 진여, 여래장, 불성, 아뢰야식 등은 실체화시킨 마음의 또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밝히고 있듯이, 마음은 수와 상을 조건으로, 즉 감성적인 측면과 이성적인 측면이 어우러져서 형성되는 즉 心理라고 정의할 수 있는 법이며, 행은 형성작용, 식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의식이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의식-심리-내면적 형성작용>의 시스템이 바로 정신인 것이죠. 대상을 인식하고 그 결과 마음이 재구성되어 생각과 말과 몸짓으로 다시금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마음을 중추신경계(정보의 통합, 재구성), 행(운동출력)과 식(감각입력)을 말초신경계로 이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心과 意, 識을 동일시하는 것도 아비담마의 오류입니다. 몸의 감각기관이자 기능인 육입처 眼, 耳, 鼻, 舌, 身, 意에서 意를 마음이라 해석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의는 뇌입니다. 눈은 시각기능, 귀는 청각기능, 코는 후각기능, 혀는 미각기능, 몸은 촉각기능, 뇌는 정신기능의 기관입니다. 감각기관과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을 배치하다 보니, 물질인 색성향미촉을 제외한 비물질적인 법과 짝을 이루는 의는 마땅히 정신적 요소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섣부른 진단에서 비롯한 실책입니다.

 

뇌가 없다면 어떻게 정신적인 기능이 발현하겠습니까. 의식불명이나 뇌사 등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머리에 약간의 충격만 주어져도 정신적인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최근 뇌과학이 이룬 성과가 이를 증명해주기도 합니다. 물론 정신을 뇌의 부수적인 산물로 취급하는 유물론적 태도는 부정할 수밖에 없지만.

 

불경이 그렇듯 성경, 노자의 <도덕경>, 공자의 <논어>, 맹자의 <맹자> 등 옛 성인과 현자들의 저술들은 당대에 직접 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사후에 제자들이 기억을 더듬어 편집한 것이지요. 장차 논란이 일어날 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라 소중한 가르침을 기록하지 않은 그 속내를 가늠키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원전 진위검증의 문제가 불거지기 마련입니다. 기억은 불완전하는 데 멈추지 않고 인위적인 조작이 가능하죠. 원전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기억이 왜곡, 굴절, 변형, 첨삭되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요? 붓다의 가르침은 남방의 <니까야>와 북방의 <아함> 두 갈래로 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경전의 내용이 똑같지 않고, 60-70퍼센트 정도만 겹칩니다.

 

붓다 사후에 수행공동체인 승가는 견해의 차이로 20여 부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교리와 계율, 수행법의 이해에서 충돌이 빚어졌던 것이죠. 최근 ‘대승비불설’이 불거진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2,5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종교로 자리매김한 불교의 이면에 짙은 그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질적인 언어와 사상을 받아들일 때 그 의미와 개념의 혼란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붓다께서도 누누이 당부하셨듯, 경전을 대할 때도 선지식들의 법문을 받아들일 때도 비판적 태도를 취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발생합니다. 몸과 말, 마음. 이는 ‘나’라고 하는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지적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어쩌면 철학적으로 ‘자아’의 탄생이라 볼 수도 있겠지요. 진리인 연기를 모르는 어둠의 상태인 무명으로 인하여, 제법의 실상이 ‘무상, 고, 무아’임을 또한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이 나만은 비켜갈 것이고 지금의 어려움, 고통은 순간이며 머지않아 돈, 사랑, 명예를 움켜쥐고서 더없는 희열과 기쁨, 행복을 영원히 내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를 ‘顚倒夢想’이라 합니다.

 

‘무명 - 행’의 고리는 무지로 인하여 고단한 유기체인 ‘나’로서의 삶이 마침내 전개된다는 선언입니다. 철학과 과학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12연기의 전개를 ‘생멸문’, 역순을 ‘환멸문’이라 칭하듯, 무명으로 인하여 생멸의 삶이 전개되지만 무명을 깨뜨리면 생멸의 삶이 부서진다는 이치입니다.

 

‘무명 - 행’의 고리, 이 둘의 연기적 관계만으로도 삶에 대한 전반적인 조망은 이루어집니다. 진리를 모름으로써 중생으로서의 삶이 펼쳐진다는 것이니, 진리인 연기를 깨달으면 번뇌에 시달리는 고달픈 중생살이를 마감하고 해탈, 열반에 이른다는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뒤이은 10가지 고리의 연기 전개는 근본적인 무지로 인하여 펼쳐지는 중생의 삶이 어떻게 고통으로 귀결되는지 말해 줍니다. 욕망의 변천사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무명 - 행’의 고리는 12지연기의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인 3세양중인과설에서 전생에 속합니다. ‘식-유’까지가 현생, ‘생 - 노사.수비우고뇌’가 후생입니다. 윤회하는 중생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지만,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구석이 있습니다. 무명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과거로 회귀해야 할 것이며, 삶의 궁극적 결과인 고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미래로 건너가야만 합니다. 또한 금생의 시작인 ‘식 <- > 명색’의 해석도 선뜻 납득하기엔 어려움이 큽니다.

 

 

識 <-> 名色

 

식은 의식입니다. 대상을 분별해서 안다는 것이 의식의 속성이자 기능입니다. 명색은 이름과 물질입니다. 색은 地水火風 4가지 요소와 그들이 어우러져서 형성시킨 물질, 여기에선 몸을 말합니다. 이름(명칭)은 이들 물질적 요소가 아닌 비물질적인 정신적 요소를 가리킵니다. 受 想 思 觸 作意가 바로 그것입니다. 思 觸 作意는 行에 포함되는 형성작용들입니다. 식과 명색은 곧 개별적 유기체인 존재 즉 五蘊(색수상행식)을 가리킵니다. 무지로 인해서 ‘나’를 형성하는 모든 법들이 발생하고, 이제 욕망의 주인공인 ‘나’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분석하는 자리입니다.

 

‘나’란 정신적 육체적 복합체인 오온이므로 정신적 요소들(수상행식)과 육체적 요소들(색)을 구별해서 갈래짓는 게 통상적인 이해겠지만, 식을 따로 떨어뜨려놓고 명과 색을 뭉쳐놓은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는 윤회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기체인 나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들이 변하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의식을 제외한 정신적 요소들 수상행은 금생의 몸과 함께 소멸하고, 다음 생의 몸과 함께 생성됩니다. 몸이 바뀌는 만큼 이전의 축적된 경험들, 정보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의식은 몸에 직접적으로 구속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금생에서의 축적된 정보를 다음생으로 갖고 갑니다. 물론 의식 또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생멸합니다만, 오랜 세월 윤회하면서 경험한 모든 앎, 지식, 정보들이 누적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수행을 통해서 과거의 앎, 경험, 지식들을 꺼낼 수 있는 것이죠.

 

부파불교 시대에 등장한 3세양중인과는 한국불교에서 연기의 정설로 굳건하게 자리잡았습니다. 3세양중인과설에 따르면, 식은 과거생에서 금생으로 연결되는 ‘재생연결식’입니다. 명색은 금생의 몸과 정신이기에 온전한 오온이어야 하지만 식이 빠져 있기에 당혹스럽습니다. 개체발생의 최초상태인 수정란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재생연결식’이라는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의식이 윤회의 주체라는의미 또한 불편합니다. 윤회의 주체는 오온입니다. 윤회를 거듭하는 중생은 오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윤회의 조건, 동력은 업으로, 의식, 말, 몸짓으로 행하는 세 가지업 가운데 의식이 근본적입니다. “중생은 업이 그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의지처이다. 업이 중생들을 구분지어서 귀하고 천하게 만든다.”

 

思는 의도. 의지인 업이며, 觸 作意는 행이죠. 즉 업이 행의 하위개념임을 드러내고 있죠. ‘촉. 작의’는 의도가 없는, 업이 아닌 기계적인 생명활동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촉은 수를 형성시키는 형성작용이며, 작의는 의식을 형성시키는 형성작용입니다. 감각기관과 대상 그리고 의식이 함께 하는 촉은 느낌의 경험을 가져오는 작용이지만, 어떤 느낌이냐는 ‘受와 想을 조건으로 하는 한순간 이전의 누적된 마음’이 결정합니다. 즉, 마음-> 촉-> 대상을 인식-> 마음의 재구성-> 업과 형성작용-> 마음의 재구성-> 인식...이렇게 오온이 작동하면서 삶이 전개되는 것이죠. 쉽게 표현하자면, 마음을 토대로 인식하고 행위하는 유기적 시스템이 곧 사람입니다.

 

 

六入

 

인간에게는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뇌가 있습니다. 이러한 감각기관을 토대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생각 기능이 발생해서 바깥 대상과 사물, 사건을 인식합니다. 안의 감각기관을 根이라고 일컫고, 바깥 대상을 境이라 합니다. 근과 경은 6입의 발생조건인 名色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6입은 무엇일까요?  대승과 아비담마불교에서는 대체로 근과 경을 안팎의 6입으로 동일시합니다.  이는 커다란 착각입니다. 6근의 작용, 활동이 6입입니다. 6입은 두 가지로 6 內入處6外入處가 있습니다. 이를 합해서 12입처라 하며, 이것이 불교의 세계입니다. 

 

6내입처는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에 '한순간 이전의 마음'이 함께 한 자리를 가리킵니다. 6외입처는 외부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에 '한순간 이전의 마음이 함께 한' 6내입처가 관계를 맺을 때, 연기할 때의 대상입니다. 눈이 바깥 형상과 만날 때, 아무런 정보, 편견, 선입견이 없는 순수한 상태로 다가가지는 않습니다. 이제껏 경험을 통해 축적된 정보가 누적된 채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축적된 정보.지식'이기에 5온(다섯 다발, 무더기)입니다. 이미 나의 감각기관이 어떤 성향.태도를 지닌 채로 대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그렇게 12입처가 발생하면서 12연기의 다음 고리인 識이 함께 하는 촉(3사화합)이 전개됩니다. 이때의 식은 새로운 식으로 또한 이전의 무더기인 식에 누적됩니다.  (n + 1) + 1......

 

6내입처와 6외입처의 각각에 배치되는 6식, 이렇게 18界라 합니다. 이것이 나를 둘러싼 세계입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인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요. 인식의 그물에 포착되지 않는 대상은 외면합니다.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이 불교 인식론에 가깝다고 할까요. 이는 불교의 궁극적인 지향이 지금여기에서 고통을 뿌리뽑고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원자, 쿼크 등의 미시적 물질계와 우주 등의 거시적 물질계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행보입니다. 물론 과학과 철학이 건네주는 지식이 삶을 좀더 풍요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3계 5도로 정리된 불교의 세계관은 일반 대중에게 무척이나 낯섭니다. 3계는 慾界, 色界, 無色界입니다. 욕계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지배적인 세계로 육체가 매우 거칠고 조밀하며, 색계와 무색계는 육체가 가볍고 미세하며 정신이 매우 맑은 수준의 세계입니다. 무색계를 육체가 없는 정신적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생은 5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소유의 욕망을 동력으로 하는 욕계는 고통과 행복의 정도에 따라서 다섯 세계로 나뉩니다.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천상. 후에 아수라를 더해서 6도라 하기도 합니다. 지옥과 아귀, 천상은 化生, 축생과 卵生, 濕生, 胎生, 인간은 胎生의 과정을 거쳐서 발생합니다. 저열한 소유적 욕망을 떨구고 존재의 욕망을 동력으로 하는 색계와 무색계는 고통이 거의 없는 수숭한 세계이지만, 중생계이기에 죽음과 윤회의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욕계의 하늘나라는 도덕적 실천으로 태어날 수 있지만, 색계와 무색계는 도덕적 실천과 아울러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태어날 수 없는 세계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접하지 않는 일반인들은 허무맹랑한 소설로 여기겠지만, 수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손톱만큼의 거짓도 없습니다.

 

 

 

감각기관인 6내입처와 바깥 대상인 6외입처 그리고 6식이 함께하는 작용을 촉, 3事和合이라고 합니다. 동행, 만남의 뜻이죠. 이로써 인간은 바깥 세상과 소통을 합니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정신적 사실들. 생각의 대상인 정신적 사실들은 法으로 번역되었는데, 전5식(색성향미촉)의 통합적인 귀결처이자 기억, 상상의 총체로 이해하면 됩니다. 6식인 의식에 이르러서 인식과정이 마무리되는 것이죠.

 

인식은 과보입니다. 아는 만큼 본다는 말입니다. 삶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껏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한 인간의 성향, 태도를 형성합니다. 일례로 감각기관이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본다는 사건에는 인식과 행위의 두 갈래가 있습니다. 인식으로서의 봄은 ‘보여지는 것’이고 행위로서의 봄은 ‘의도가 개입된 보는 것’입니다. 길을 걸을 때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의 성향, 기호를 원인으로 하는 과보인 것이죠.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동차가 눈에 잘 띌 것이고, 이성에 관심이 큰 사람은 매력적인 이성에게 눈길이 꽂힙니다. 과보로서의 인식과정이 끝나면 마음이 재구성되고 의도.기대.지향의 정신적 요소들이 어우러진 생각과 함께 그 대상에게로 눈길을 건넵니다. 혹은 말을 걸거나 손짓으로 호감을 드러내기도 하겠죠.

 

 

 

수는 느낌, 감수입니다. 인식에 이어지는 반응이죠. 물론 정신적 요소인 想이 함께 합니다. 수는 苦와 樂, 捨로 3가지로 구분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5가지 혹은 108가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고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느낌, 락은 유쾌하고 즐거운 느낌, 사는 평온한 느낌입니다. 불쾌하고 유쾌한 느낌은 가급적 지양하고, 평온을 지향하는 것이 감각적 쾌락에 지배되지 않는 길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想이라 번역된 인지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인지는 표상, 개념, 언어, 기호, 상징 등이 이루어지는 정신적 작용입니다. 인지를 색안경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편견, 선입견으로 세상을 마주합니다. 진리인 연기법을 모르기에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 인생관은 대체로 그릇되기 일쑤입니다. 자기합리화와 정당화, 자기기만의 삿된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諸法實相 如實知見. 모든 사태와 사실, 존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라. 제법의 참 모습이 ‘무상, 고, 무아’임을 꿰뚫어보고 안다면, 모든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이것이 해탈이고 열반 아니겠습니까.

 

감성적 작용인 수와 이성적 작용인 상이 바깥 대상에 대한 심리적 태도인 마음을 형성합니다. 탐욕의 마음, 성냄의 마음, 어리석은 마음, 자애로운 마음, 연민의 마음, 지혜로운 마음 등 보통 16가지 마음으로 구분하는데, 사실은 사람 수만큼 마음의 종류도 다양할 것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 물질보다 16-17배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에서 물질의 생멸속도를 10의 22승인가로 확인했다니 마음의 속도는 상상할 수 없겠지만, 큰 의미는 없겠죠. 변화무쌍한 마음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감각적 쾌락을 내 것으로 하겠다는 소유적 욕망에서 좀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겁니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다만 취하고 버리는 것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는다면

확연하게 밝아지리라

 

선불교의 3조 승찬스님의 게송집 <信心銘> 첫구절입니다. 아름다운 게송입니다. 대승에서 궁극의 경지로  '無分別'을 주장합니다. 나와 너,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하나임을 말합니다(不二). 하지만, 분별하지 않는다면 바위나 나무가 되라는 것일까요. 자아와 세계, 좋고 나쁨, 올바름과 그릇됨, 진실과 거짓, 선과 악...등은 이분법적 실체론적 존재론을 극복하고 연기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분별 자체를 허망하고 그릇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그릇되고 왜곡된 허망한 분별을 내려놓고, 연기에 따른 바르고 진실된 분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이 연기한다고 해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서 하나인 것은 아니죠. 대승의 무분별, 空, 마음 등은 그 개념이 연기법과 과연 부합하는지 비판적 태도로 접근해야 합니다. 

 

선종에서는 대체로 마음을 초월적 실체로 여기는 듯한 태도를 취해서 안타깝지만, 모든 수행자가 그러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유식학과 중관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 <大乘起信論>에서도 마음이 초월적 실체로 등장합니다. 아비담마에서 대승까지 마음이 일원적이며 관념적인 실체로 자리하면서, 본체와 현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실체를 부정한 붓다의 가르침과는 매우 이질적이죠.

 

 

愛, 取

 

愛는 갈구, 갈애. 소유하고자 하는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의 끝없는 압박이 바깥 현실에 투사되는 단계입니다. 취는 취착. 욕망의 투사가 대상에 강하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단계입니다. 그런 까닭에 있는 그대로의 본모습이 현실에서 지워져 버립니다. 자본주의경제체제에서는 욕망이 소비와 소유라는 형태로 전개됩니다. 욕망의 속성은 만족이 아닌 ‘끝없이 욕망하기’이므로, 욕망이 자신을 집어삼킬 때까지 인간은 욕망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有는 업이 작용하는 단계입니다. 생각과 말과 몸짓으로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업을 짓습니다. 업력은 두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바깥 대상과 안의 마음입니다. 성향, 체질, 성격, 습관 등이 더욱 견고해지거나 또는 새로운 성향과 습관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生 - 老死. 苦

 

3세양중인과는 한 단위로서의 유기체가 소멸하고 새로운 몸을 받는 미래생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12지연기의 가르침은 지금여기에서의 고통의 원인인 갈애와 무명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소멸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有를 조건으로 우리는 몸은 인간계에 있지만, 한순간이나마 지옥중생, 축생, 아귀, 인간, 하늘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죽고 다시금 새로운 존재로 윤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인식하고 행위하느냐, 그 순간순간의 업력들이 쌓여서 금생의 ‘나’라는 정체성이 확립될 것이고, 죽음 후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결정됩니다.

 

죽음이 두려운 까닭은 몰라서 두렵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대체로 고통스럽기 때문일 겁니다. 불멸은 인간의 오랜 숙원입니다. 그렇기에 유신론과 실체론이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모든 존재는 이미 불멸입니다. 영원회귀하는 윤회의 고통스런 과정을 끝내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12지연기는 마음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인식과 행위의 정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진리인 연기법은 깊고 심오하고 미묘하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깨닫기 어렵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다."라고 붓다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우리는 진리에 성큼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수행지도인 8정도를 철저히 닦아 해탈, 열반이라는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는 막중한 과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대념처경 大念處經>에 의지하여, 사마타와 위빠사나, 정혜쌍수 定慧雙修, 지관겸수 止觀兼修 수행에 방일하지 않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