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과 언어, 사유
붓다의 가르침인 3법인은 “제행무상, 제행개고, 제법무아”입니다. 열반을 제외한 모든 존재의 보편적 특징이자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존재 혹은 작용은 영원하지 않고,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러우며, 그러한 상태를 이렇게 저렇게 뜻대로 다룰 수 있는 고정불변의 실체인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無我’사상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지, 다른 무엇이 나를 갈음하여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인지. 붓다께서는 현실적인 ‘나’도 없고,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자아. 참나. 진아’마저도 없음을 단호하게 선언하셨지요. 무아를 철저히 깨치는 것이 붓다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불교 수행의 점진적 결실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한, 아라한의 4向4果가 있습니다. 중생과 구별되는 깨달은 성자들로, 4향은 입문, 4과는 성취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각 성자의 단계마다 부서지고 소멸되고 무너지는 번뇌의 종류가 배치됩니다. 말하자면, 깨달음과 성자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입니다. 10가지 족쇄로 낮은 단계의 5하분결, 높은 단계의 5상분결로 구분합니다.
5하분결 -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탐욕, 성냄
5상분결 - 색계에 대한 탐욕, 무색계에 대한 탐욕, 자의식, 들뜸, 무명
수다원은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이 사라집니다. 어찌 보면 8정도의 ‘바른 견해’라 할 수 있으며, 가장 낮은 단계의 깨달음이랄 수 있겠죠. 사다함은 수다원에 비해서 탐욕과 성냄의 번뇌가 아주 미세한 수준입니다. 물론, 성자들의 탐욕과 성냄은 중생들의 거친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탐진치에 지배된 범부중생의 눈으로 가늠키는 어렵습니다. 수다원과 사다함은 욕계중생으로 몇 번 윤회하다가 아라한이 되어 열반을 맞이합니다.
아나한은 5하분결을 완전히 제거하고 존재에 대한 욕망과 자의식, 들뜸, 무명만이 남아 있습니다. 아나한은 욕계중생으로는 윤회하지 않고 색계 정거천 하늘에 윤회하여 그곳에서 마침내 깨닫고 아라한이 되어 열반을 맞이합니다. 아라한은 5상분결을 완전히 깨뜨리고 어떤 번뇌도 남아 있지 않은 궁극의 경지입니다.
10가지 족쇄에서 ‘나’와 관련된 번뇌는 유신견, 자의식입니다. 有身見은 정신과 육체의 복합체인 五蘊을 나라고 여기는 견해로, 중생의 오온은 五取蘊이라고 부릅니다. 육체와, 감수, 인지, 형성, 의식의 다발들, 무더기들을 제각기 또는 총체적으로 ‘나’라고 ‘내 것’이라며 착각하고 집착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유신견을 깨뜨리지 못하면 중생에서 성자로 탈바꿈할 수 없습니다. 성자들의 법문을 듣고 오랫동안 사유한다고 해서 유신견이 부서지지는 않습니다. 수행이 뒷받침 되지 않는 이해는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실제 대상(사람과 사물, 사건)과의 만남과 그 관계를 전개시키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상대적으로 인격이 좀더 향상되었다 뿐이지, 범부의 수준에 여전히 머물 수밖에 없다는 얘기죠.
생각으로써, 올바른 견해로써 유신견이 무너지고 부서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근현대 철학사에서 무아사상에 접근한 철학자들도 성자의 반열에 올랐으리라 믿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영국 경험론의 흄이나 러셀, 독일 관념론의 칸트, 쇼펜하우어, 구조주의 철학자인 소쉬르, 데리다, 들뢰즈 등이 어쩌면 대승불교의 수행자와 학자들보다는 붓다의 가르침에 더 가깝게 다가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신견이 깨졌음을 부서졌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유신견이 부서진 수다원 이상의 성자에게 확인을 받거나, 그렇지 않다 해도 수행을 통해서 스스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교학과 수행방법에서 어지러운 난맥상의 한국불교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수다원인 수행자마저도 친견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훌륭한 스승과 뛰어난 도반, 법우들이 곁에 있다 하여도 결국 수행은 스스로 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이나 결실에 대한 점검 역시 스스로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수행과정과 점검에 대한 지침은 이미 붓다께서 자상히 말씀해 주셨기에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5하분결의 유신견과 5상분결의 자의식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 몸과 정신을 나라고, 내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 것이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에 사로잡힌 오취온이 부서지면, 이 몸과 정신은 오온이 됩니다. 오온이 내가 아니라 해서 無我가 되나요? 여기까지는 非我입니다. 표층적 의식 수준입니다. 자의식은 빨리어로 asmi mana “내가 있다”인데, ‘자만’ ‘착각’ ‘자기화’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수준의 심층적인 의식으로 ‘진아, 참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온이 내가 아니라 해도, 현상 너머의 그 어딘가에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무엇이 존재하며 그것을 참나, 주인공, 아트만, 진아, 자아로 부르는 것이죠.
삶, 그 어디에서도 현실적인 나도 본질적인 나도 찾을 수 없습니다. 색수상행식으로 이루어진 안의 오온이 밖의 오온과 상호작용하면서 연기하면서 생멸하면서 흐르는 것, 이것이 전부입니다.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면서, 이것이 나다 내 것이다 다투면서 뛰어드는 것, 이것이 현실의 풍경입니다.
문제는 왜 이러한 자의식이 형성되는 것인지입니다. 붓다께서 정등각하시고 동료 수행자인 다섯 비구에게 처음 사성제를 설하시고 이어서 無我를 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인 다섯 아라한이 출생했습니다. 3법인의 핵심인 무아설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고 변화하며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러운 오온을 이렇게 저렇게 뜻대로 다룰 수 없기에 무아임이라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로서의 현실적인 나는 존재하며, 그 이면에 그러한 나를 지배하는 본질적인 참나가 존재한다고 착각하기 십상입니다. 그 참나를 확인하고 참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유신론적 종교와 사상이 붓다 이후에도 수천 년 동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손은 스스로를 더듬지 못하고, 칼은 스스로를 베지 못한다’라는 선가의 법문이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적 분리를 멀리하는 선가의 입장을 헤아리자면, 마음은 마음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므로 어쨌든 알음알이인 분별지를 내지 말고 마음을 쉬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 같은데요, 연기로 이해함은 어떨지요. 손은 더듬기 위해서 존재하며, 칼은 베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더듬기 위한 대상과 베기 위한 대상이 없다면, 손도 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손과 칼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확인해야 합니다. 감촉의 대상과 베임의 대상을 확인하면서, 손과 칼의 성품과 작용, 그 구조와 의미를 확인할 수 있지요.
언어문자의 형성 또한 객관적 대상, 주관적 관념과 분리시켜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주관과 객관의 관계맺음은, 표상. 개념. 언어. 기호 등의 형성작용을 하는 인지에 의존합니다. 언어문자 없이는 인식작용 자체가 어렵습니다. 결국 인간은 언어로써 대상을 인식하고 사유합니다. 개념화할 수 없는 대상은 실재하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제법의 실상인 ‘무상, 고, 무아’는 인식대상들의 보편적 성품, 특성을 드러낸 것이지, 낱낱의 개별적 구조와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감각기관이 바깥 사물과 사건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 고유의 방식으로 대상을 재현할 따름입니다. 언어 또한 불완전한 인식을 불완전하게 재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미경과 망원경이 시각능력을 좀더 확대시켜주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 고유의 감각기관의 특징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언어와 사유가 동일하다면, 사유의 구조와 언어의 구조는 다르지 않다는 얘기가 됩니다. 사유의 구조를 확인하자면, 대상을 서술하는 언어 구조를 분석하면 되겠지요. 개념, 판단, 추론으로 형성되는 문장에서, 주관인 ‘나’와 객관인 ‘너’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나는 원래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합니다. 너 또한 다를 바 없습니다. 주어와 목적어는 사태, 사실을 드러내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데, 원래부터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로 착각케 됩니다. 자의식은 이렇게 언어와 사유의 심연 저 깊고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사유와 언어의 구조 그 자체가 자의식의 모태입니다.
그렇다면, 분별을 뼈대로 하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자의식이 뿌리뽑힐까요. 정확하고 적절한 분별이 지혜 작용일진대, 분별하지 않는다면 제법의 실상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알고 볼 수 있겠습니까. 언어와 사유 구조의 태생적 한계를 직시하고서, 더 나아가 인식과 행위의 주체가 ‘나’라는, 이 몸과 정신의 이면에 ‘참나’가 있다는, 전도된, 거꾸로 선, 뒤집힌, 그릇된 견해를 바로 세우고, 멈춤과 통찰 수행으로 유신견과 자의식을 조금씩 떨치고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無我의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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