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쉬운 불교, 어려운 불교

slowdream 2022. 8. 8. 20:29

쉬운 불교, 어려운 불교

 

종교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철학은? 과학은? 얼추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답을 꺼내놓기에는 어려운 대상들입니다. 종교는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 있으니 일단 젖혀놓고, 학문적 범주인 철학과 과학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해 볼까요.

 

인간과 자연, 곧 주체와 객체가 전개되는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대별하면 철학과 과학입니다. 철학은 정신영역인 형이상학적인 차원, 과학은 물질영역인 형이하학적인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죠. 실험과 관찰을 매개로 삶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과학이며, 정신적인 분석과 통찰 곧 사유로써 삶을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의 위상은 사실 고대나 현대나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 인도의 명상과 결합된 다양한 실천철학, 중국의 제자백가, 근대의 합리주의 경험주의 관념론, 현대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상위 범주에서 하위범주로 좀더 다양하게 가지를 뻗어나갔을 뿐, 오히려 현대철학이 고대에 비해서 뒷걸음질을 쳤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에 힘입어서 전개되는 과학의 역사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지요. “철학의 역사는 개념의 역사”라고 정리한 철학자도 있습니다. 어려운 얘기 백날 새롭게 늘어놓아봤자 언어 유희에 지나지 않다라는 비판이겠죠.

 

과학 또한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실험, 관찰에는 도구, 매체의 역할이 전부입니다. 과학의 발달사는 도구의 발달사입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기관을 대신해서 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구의 발명과 발전이 과학의 역사입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튼,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스티븐 호킹...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뇌과학, 유전공학...그러나 미시의 세계이든 거시의 세계이든 원자 이하의 세계와 태양계 밖의 세계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는 있지만 가설과 잠정적 결론에 머물 수밖에 없지요.

 

철학은 경험을 계량화할 수 없는 대상인 정신적 영역인 욕망과 그 구조를 탐구하는 반실증주의의 영역이랄 수 있습니다. 반면 자연과학은 실험과 관찰, 계산으로 세계와 사건에 대한 예측가능한 실증적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논리학 또한 실증적 태도이나 언어문법구조의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지요. 계량화는 대상을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동일성의 존재로 취급합니다. 흐르는 물을 한줌 떠내서 측정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연속적인 흐름인 관계의 단절이라는 한계에 노출됩니다.

 

어찌됐든 삶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철학과 과학 모두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끝, 죽음을 대면해야 하니까요. 삶의 이편과 저편, 사방에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죽지만, 정작 나는 그 죽음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온통 널려 있는데 나는 경험하지 못한다는 아이러니. 삶의 오묘함이죠.

 

그렇다면 종교는 과연 죽음이라는 문제에 해답을 건네주고 있을까요?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교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들 제각기 삶과 죽음의 실상에 대해서 이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검증할 수는 없으며 맹목적 믿음만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불교는 맹목적 믿음과 형이상학적 추론, 오랜 세월 의심의 여지없이 전승되어온 모호한 가르침에서 벗어나, 교학과 실천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모든 의문들을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불교가 2,60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전승되어 오며 모습을 달리한 탓에 어떤 모습이 붓다의 참 가르침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붓다 당대의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선불교...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어려운 불교 교리를 대중들이 좀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끔 민중적 요소가 강해졌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불교는 어렵습니다. 다른 것도 아닌 진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당연한 얘기지요. 붓다 당시의 인도 사회가 수행과 다양한 이론들이 난무했다 쳐도, 어디까지나 지식인들의 몫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생산력이 낮은 계급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에서 헤어날 수 없었겟지요.

 

밀교와 선불교는 그런 측면에서 일종의 ‘종교혁명’이랄 수 있습니다.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던 불교를 대중들의 품에 안겨주었다는. 하지만 그 부작용도 심각합니다. 근본적 교리의 심각한 변형과 왜곡, 굴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올바른 견해’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8정도의 첫 자리가 ‘正見’이며, 성자의 첫관문인 예류도를 성취하기 위해 소멸해야 하는 족쇄 3가지는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즉 견해에 관한 것입니다. 불교 교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불교를 이해하고 수행에 나아간다는 것이 심히 우려되는 이유입니다. 수행과정에서의 다양한 체험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교학은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붓다 가르침의 골수는 4성제, 3법인, 12연기입니다. 무척 단순하고 소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숱한 출가자와 재가 수행자, 학자들이 제각기 나름대로 법문을 쏟아내고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지경입니다. 정도를 걷고 있는 분들을 추리자면,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다고 봅니다. 게다가 법문의 편차가 큰 탓에 대중들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 경전은 두 갈래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붓다 열반 후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수백년 후에 문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아가마경전과 니까야경전이 그것입니다. 북방으로 전승된 아가마는 중국에서 한문아함경으로, 다시금 한글아함경으로 번역되었고, 남방으로 전승된 빨리어 니까야는 최근에 한글로 번역되어서 붓다의 원음에 접근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감묵스님과 전재성박사가 제각기 니까야경전 완역을 마쳤고, 해피스님과 이중표교수 또한 니까야 경전 독해에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들의 어학 실력과 교학적 이해, 수행 수준이 제각기 다른 까닭에 가장 기본적인 개념 정리도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대중들 입장에서는 어느 분의 말씀을 좇아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일례로 sati에 대한 개념도 혼란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5온도 마찬가지이며, 4성제 3법인 12연기 또한 다를 바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불교인 스스로 정견을 갖추고 헤쳐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어찌 보면 불교가 자생적이지 않다는 데서 기인한 당연한 어려움일 겁니다. 서양의 사유체계는 분석적입니다. 반면, 동양의 사유체계는 직관적입니다. 서양의 철학고전들과 동양의 철학고전들을 비교해 보면 명확해집니다. 인도-유럽어족의 분석적인 사유체계가 우리에게 낯익지 못한 탓에, 불교 교리에 대한 접근과 이해에는 상당한 노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선불교가 동아시아인에게 좀더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도 일면 그러한 배경이 작용해서일겁니다.

 

불교가 쉽다, 어렵다는 사실 논쟁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정확하게 전승되었느냐 아니냐가 관건이겠지요. 붓다는 수십억 겁만에 한 분 출현합니다. 물론 현재 겁은 ‘행운의 겁’이라 하여 미래에 오실 미륵부처님까지 합하여 세 분이나 됩니다만. 겁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므로 몇 겁이네 따지는 건 의미가 없겠죠. 붓다를 친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분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축복받은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윤회하면서 알게모르게 공덕을 쌓은 과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어렵다 해도 어차피 뚫고 나가야 할 장애물입니다. 어려운 만큼 간절하고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붓다를 친견할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늘 비판적 자세를 잃지 않고 경전과 법문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니까야나 아함경전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인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이나 선불교 선사들의 어록도 반드시 받아지니고 이해해야 합니다. 옥석을 가릴 수 있는 혜안을 갖추는 과정입니다. 도둑놈이나 사기꾼을 선지식으로 스승으로 모시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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