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탄생
한 개인에게 내던져진 삶의 궁극적 목적을 거칠게 뭉뚱그려서 이해하자면, 욕망의 자기화, 실현 아닐까요? 그렇다면 대저 욕망이란 놈은 무엇인지, 욕망하는 나란 놈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욕망의 주체라고 착각하는 ‘나’ ‘자아’ ‘자기’는 아라한이 되어야 부서지는 실체론적 착각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무아’를 증득하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 길을 떠나기 전에, 오온의 구성요소 또는 오온의 총체를 ‘나’라고 간주하는 유신견을 먼저 소멸시켜야 합니다. ‘무아’에 비하면 욕망은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욕망은 그 다양한 모습과, 발생과 머묾, 소멸을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탐욕, 간탐, 갈구, 애착, 집착 등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번뇌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어서 내 것으로 하고자 하는 욕계에서의 소유적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칠고 천박한 소유적 욕망을 떨군, 색계와 무색계에서의 존재적 욕망이 있습니다. 존재적 욕망은 선정 수행을 통해 체험하는 수승한 경지에 머물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욕망은 인식과 행위 모두에 걸쳐서 작용합니다. 인식과 행위의 토대가 마음이므로 당연히 마음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요. 마음은 오온 가운데 감수 受와 인지 想로 구성됩니다. 대상을 인식한 후에 마음이 재구성되면서 욕망이 발생합니다. 길을 걷다가 꽃을 봅니다. 곱고 이뻐서 꺾어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합니다. 혹은 다른 사람들도 즐기게끔 잠시 감상하고서 가던 길을 갑니다. 순화된 소유적 욕망의 발생입니다.
진리인 연기법에 따라 욕망 또한 연기합니다. 12연기에 ‘觸-受-愛-取-有’의 전개가 있습니다. ‘촉’은 마음이 함께 하는 6내입처와 6외입처 그리고 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보통 3사화합이라고 하죠. 꽃에 대한 사랑스러운 마음이 깃든 눈의 시각의식이 꽃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수’가 연기합니다. 수는 상과 늘 함께 합니다. 방금 인식한 꽃과 과거 꽃에 대한 기억이 함께 하면서 새로운 느낌과 판단이 일어나고 마음이 재구성됩니다. ‘기대했던 만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꽃’ ‘기대에 못 미치지만 이쁘고 향기도 괜찮은 꽃’ 등 다양한 판단이 성립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takka라 합니다.
takka라는 개념은 경전에서 잘 드러나지 않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음의 재구성’입니다. 어떤 분은 ‘순수의식’이라고 규정했는데, 조금 모호합니다. vitakka는 경전에 자주 나와서 익숙하겠죠. 보통 ‘일으킨 생각’으로 이해합니다. vi는 ‘떨어져 나온, 분리된’이라는 뜻이니, takka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무방합니다. 재구성된 마음인 takka를 토대로 일어난 생각입니다. 꽃을 확인하고서 꽃에 대한 탐욕스런 마음이 형성됩니다. 꽃을 꺾어서 집으로 가져갈 것인지, 그냥 감상만 할 것인지, 꽃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스쳐갑니다.
vitakka가 확장되면서 ‘愛-取’가 연기합니다. 생각이 정리되고 꽃을 집에 가져가겠다며(愛) 꺾습니다(取). 그렇게 의도적 행위인 꽃을 소유하겠다는 결정(의업)과 "참 이쁘네" 감탄하며(구업) 꽃을 꺾는 행위(신업)를 짓습니다. 그리하여 ‘길가에 핀 꽃을 꺾어 집에 가져가는 사람’인 존재(有)라는 과보를 낳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삶의 경험들의 내용이 쌓이면서 새로운 존재로 매순간 태어납니다.
이렇듯 욕망은 takka에서 탄생합니다. 곧 마음이 욕망의 모태이고 의지처이고 토대입니다. 지금 이순간 어떤 마음 心理이냐에 따라서 욕망의 성격과 방향이 좌우되는 것이죠. 범부중생은 대체로 탐욕스런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 세 가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쌓임이 결국 나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권력욕이 강한 사람, 명예욕이 강한 사람, 재물욕이 강한 사람, 성욕이 강한 사람, 식욕이 강한 사람, 수명욕이 강한 사람...물론 정체성 또한 연기하기에 무상하고 무아일 따름입니다.
인식 識 - 마음 心(受 想) - 행위 行
위 네 가지 법은 오온 가운데 色을 제외한 정신적 요소들입니다. 한 순간 이전의 마음이 인식에 조건하고, 새로운 인식은 새로운 마음에 조건하고, 그 마음은 다시금 새로운 행위에 조건합니다. 또한 그 행위는 안팎으로 과보를 불러일으킵니다. 꽃을 꺾어서 집에 가져왔는데, 사유지여서 주인이 고발해서 도둑놈으로 경찰에게 불려갑니다. 도둑놈, 경찰에게 불려감이 안팎의 과보입니다. 결국 행위는 인식과 마음에 되먹임 feedback 하는 조건이 됩니다. 연기는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의 의존적 발생입니다.
삶의 모든 과정들, 인식과 행위의 중심에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순간, 어떤 마음이 형성되고 있는지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다른 의미에서의 一切唯心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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