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인과응보의 두 갈래 이해

slowdream 2024. 10. 16. 01:54

인과응보의 두 갈래 이해

 

인과응보, 인연과보, 업보, 업인과보 등등으로 회자되는 업설은 진리인 연기법과 맞물림과 동시에 어쩌면 우리 현실에 가장 정합적이고 또한 지극히 실용적인 대상입니다. 이는 곧 심오하기 그지없는 진리인 연기법의 깊은 속내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마중물이라 할까요.

 

삶에 대한 물음은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나는, 왜,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느냐’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표층적이며 통속적이며 일상적입니다. 두 번째는 심층적이며 초월적이며 신비적입니다.

 

첫 번째의 답은 이렇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못된 짓 하면 고통을 받는다 善因樂果 惡因苦果.’

크게 반박할 무엇이 없는 이치라 해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는 금수저 누구는 은수저, 못된 놈이 잘사는 경우 등등 이해할 수 없는 차별성이 허다하잖아요. 그런 까닭에 보다 심층적인 이해가 요구됩니다.

 

보다 중요한 두 번째 답으로 가봅니다.

 

선불교 화두집인 <무문관> 2칙에 <백장야호 百丈野狐>가 등장합니다. 대충의 줄거리를 읊어봅니다.

백장선사께서 설법하는데 늘 한 노인이 법을 듣고는 대중들을 따라 돌아갔다. 헌데 하루는 가지 않고 있어 선사께서 물었다.

“거기 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

“저는 과거 가섭불(迦葉佛) 때에 이 산에 살았었는데 한 학인(學人)이 묻기를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하여,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대답하여 5백생 동안 여우의 몸에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화상께 청하오니 한마디로 깨닫게 해주십시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께서 말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不昧因果).”

노인은 말끝에 크게 깨닫고 선사께 감사의 말을 하고는

“저는 이제 여우의 몸을 면하여 산 뒤에 있으니 화장하여 보내주시기 빕니다.” 하였다.

선사는 대중들을 이끌고 산 뒤 바위 아래에 도착하여 지팡이를 휘저어 한 마리 죽은 여우를 꺼내고는 의전의 예를 지켜 화장을 하였다.

 

아름답고 숭고한 설화인데요, 소박한 대중들을 교화하고자 하는 애틋한 방편입니다. 한국불교 조계종은 선종의 맥을 잇고 있기에, 화두를 대상으로 하는 간화선을 으뜸으로 삼습니다. ‘불과인과, 불매인과’를 화두로 삼고서 내내 정진하는 것이죠. 또한 언어문자와 분별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기에, 이치적으로 화두를 대하지 말라고 경책합니다. 그럼에도 엄청난 양의 선어록과 법문집, 주석서, 해설서가 중생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차치하고, 어쨌든 중요한 것은 화두가 건네진 그 자리의 상황과 맥락입니다.

‘불락인과’는 인과에 대한 이해가 어설픈 수행자가 감히 단언했다가 5백생 동안 그 과보를 여우몸으로써 치렀다는 안타까운 귀결이며, 백장선사의 ‘불매인과’는 그 인내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아름다운 선언입니다.

 

해탈과 열반은 불교 수행자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입니다. 이 또한 진리인 연기법, 즉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해탈 또한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는 유위법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해탈만은 유일하게도 업력을 낳지 않는 상태이므로 또한 무위법이라는 얘기입니다. 해탈,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지극히 유위적입니다. 다만 그 경지에 이른 상태가 ‘무지와 집착의 꺼짐’이기에 신비적, 초월적으로 표현될 따름입니다. 어려운가요? 어쩌면 중국 선불교가 노장자의 유위, 무위 개념을 차용하면서 어지러워진 것에 그 뿌리 깊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문관 38칙 <소가 창문을 빠져나가다 牛過窓櫺>입니다.

오조법연스님이 말씀하셨다.

“소가 격자 창틀을 빠져나간다. 헌데 머리와 몸통, 네 발은 빠져나가는데, 어찌하여 꼬리는 빠져나가지 못하는가?”

 

덩치가 큰 바위만한 소가 방석 크기의 격자 창틀을 신통방통 빠져나가는데 한줌 허리도 안 되는 이놈의 꼬리는 어떤 까닭에 창틀에 끼어 꼼짝 못하느냐는 황당한 얘기입니다.

이 화두 또한 ‘인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재미있는 비유가 있습니다.

거북이가 알을 물가에 낳고서 산으로 돌아갑니다. 헌데 천적의 횡포가 두려워 꼬리로 살살 발자취를 지웁니다. 발자국은 지워지지만 안타깝게도 꼬리의 흔적은 뚜렷히 남습니다.

 

이 두 가지 화두는 인과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데 그 의도가 있습니다. 물론, 이제껏 제가 대했던 여러 출가자와 재가학자들의 해석은 이와 현격하게 다릅니다. 연기법에 대한 이해가 설익은 탓인지라, 그분들에 대한 더 이상의 논평은 하지 않겠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인과응보인 연기법은 세 가지 층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동시성, 중첩성, 다면성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전에 올린 <진리인 연기법>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