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편지 2. 미분, 그리고 언어

slowdream 2024. 10. 10. 01:43

미분, 그리고 언어

 

어떤 한 점에서 또 다른 어떤 한점에 선을 그어하나의 직선을 만들면 기울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x축과 y축으로 이루어진 좌표평면에서 xy축 모두 양의 상태인 1사분면의 어떤 하나의 점즉 (a,b)에서 우측으로 a가 x만큼 증가하고 위로 b가 y 만큼 증가한 (a+x,b+y)라는 점을 이어 직선을 그으면 그 두점 사이의 평균변화율, 즉 기울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즉, (b+y) - (b)/(a+x) - (a)b의 증가량을 a의 증가량으로 나눈 값이 기울기입니다따라서 기울기는 x축의 변화가 얼마나 y축의 변화를 초래하는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따라서 평균변화율 즉, 기울기는 두점 사이의 시간 등의 변화에 따른 변화율의 평균을 의미합니다두 점을 연결하는 방법은 무한대의 경우의 수가 있지만두점을 이어주는 직선은 단 하나뿐입니다미분은 평균변화율 개념을 적용해서 불가능해보이는 한점에서의 순간변화율, 즉 기울기를 알아내기 위한 것입니다단순하게 생각해도 한점을 지나는 직선의 수는 거의 무한대입니다이 무한대를 조금 다르게 적용해서 생각해보면위에서 말한 x가 무한히 a로 가까워지면결코 a가 될 수는 없지만(a+x)라는 점은 (a)라는 점에 한없이 가까워질 것이고(b)라는 점은사실 (a)라는 점의 함숫값 f(a)이므로(b+y)라는 점도 (a)라는 점의 함숫값 즉 f(a)에 무한히 가까워질 것입니다이를 limx->a일때f(a+x) - f(a)/(a+x) - (a)또는 (a)와 (x) 사이의 차이, 즉 변화를 h라 하면두 점은 (a, f(a)) 와 (a+h, f(a+h))가 되고이는lim h->0일때f(a+h) - f(a)/(a+h) - (a)가 됩니다한 점에서의 기울기, 즉 순간변화율을 구하는 것을 미분한다고 하며 순간변화율을 미분계수라고 합니다미분계수의 함수를 도함수라고 합니다함수 f(x)의 도함수를 f'(x)라고 합니다휴...숨이 턱턱 막힙니다여러분은 어떠신가요?미분이라는 명확한 그리고 일반적인 개념을 그래프나 어떤 이미지의 도움도 없이 글로 표현하려니 쉽지 않네요아마도 두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첫번째로 제가 미분의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거나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어쩌면 본질적인 문제일 수 있는데 언어 자체의 한계 때문인지도 모릅니다그럼에도 수학은 여러가지 이미지, 그래프나 좌표평면 등을 활용하면 이 미분의 개념을 좀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거나 표현 능력을 키우면 설명을 좀더 확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문학은 이런 언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학처럼 다른 어떤 보조수단 없이 오로지 언어에만 의존해야합니다작가의 심상, 생각, 개념 등을 사물 위에서 미끄러지는 언어로만 표현해야합니다이대형 선생이 작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설명해주면 좋겠다는 말과 성철호선생의 유명하니까 그렇지 작가도 잘 모를 것이다의 딱 중간 정도에 문학이 존재하지 않을까?싶습니다적어도 작가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또 이를 글로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끝없이 사물 위에서 미끄러지는 언어를 가지고 적확한 표현을 찾아 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사람이어야하기 때문입니다수학, 예를 든 미분은 제가 아무리 잘 설명해도 미분 다시말해 언어 그 이상이 될 수 없지만문학은 언어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마치 한 점에서의 기울기처럼 무한대로 미끄러질 수 있어서 작가의 설명으로도 명확해지지 않아야 문학이 되는 아이러니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설명도 의도에서 자꾸 미끄러질 수 밖에 없으므로그렇다고 알지 못한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제가 미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위와 같은 장광설을 쓸 수조차 없을테니 말입니다...문학은 평균변화율이 아니라 순간변화율입니다순간변화율은 무한입니다유한한 우리네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평균보다 순간에 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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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E님

뉴튼, 로크, 스피노자 등이 동시대 인물이죠. 칸트는 100년 후 인물이라고 이해합니다. 갑자기? 아, 이건 엄청나게 중요한 팩트지요. 양자역학의 역사도 마찬가지죠. 저는 누구의 생각을 읽을 때 그 친구가 어떤 시공간에 있었는가를 일단 점검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니체, 하이데거, 라깡, 들뢰즈 등등...어쨌든 미분을 수학적으로 던졌을 때, 사실 그 친구들은 그 미분에 대해서 적잖이 불편해 했어요. 칸트의 ‘물자체’인 거죠. 수학이든 기하학이든 얼추 챙긴 물리학이든, 그 녀석들은 계량화할 수 없는 대상이 있음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요새 읽고 있는 “차이와 반복”의 들뢰즈도 미분을 슬쩍 건네긴 하는데요, 지적 오만함 혹은 열등감입니다. 아, 저는 미적분 잘 모릅니다. 다만, 이놈의 마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상을 이해하는지 그거에만 꽂혀 있어요. 마음의 미적분, 혹은 양자역학인데요..정말 궁금합니다.

 

‘사물 위에서 미끄러지는 언어’는 그 녀석의 꼬랑지를 잡고서 쥐흔들면 ‘평균변화율’ 혹은 ‘순간변화율’... 이런 현란한 명제는 어차피 처음이 없었다고 에미애비도 없었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지요. (아, 이건 베르그송의 독백이기도 합니다. 다들 아시지만). 혹은, 이런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죠. 미끄러지는데, 무슨 얼어죽을 유한 무한을 들먹이느냐. 미끄러짐의 유한과 무한을 들먹인다면, 그냥, 이놈의 하초를 내려다보면서 서글퍼지는 그런 시공간이지 뭐....제가 아는 지금까지의 들뢰즈입니다. ㅎㅎ

 

콰인이나 괴델, 닐스 보어, 이런 친구들은 미분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미분이 그리워했던 궁극의 자리가 ‘空’ 아닐까? 혹은 제가 이해하는 삶의 궁극적인 기호인 80-8500-689093. 그렇다고 해서 노자와 장자, 크리스테바가 얘기했던 어설픈 ‘상호텍스트’는 뛰어넘지 못한 건 아닌데...으으으으응

 

고맙습니다 E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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