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41장. 크게 웃지 않으면

slowdream 2007. 8. 11. 01:24
 

<제 41장. 크게 웃지 않으면 道가 아니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健德若偸 質德若渝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으뜸인 사람은 道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중간치는 道를 들으면 있는가 없는가 의심하며, 얼치기는 道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크게 웃지 않으면 道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옛말에 이르길 ; 밝은 道는 어둡고 흐린 것 같고, 앞으로 나아가는 道는 물러나는 것 같고, 평탄한 道는 울퉁불퉁한 것 같고, 으뜸 가는 德은 저 아래 골짜기 같고, 가장 흰 것은 더러운 것 같고, 넓은 德은 부족한 듯싶고, 강건한 德은 구차한 듯싶고, 참된 德은 변하는 것 같다. 크게 각진 모에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만들어지지 않고,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모양은 보이지 않는다. 道는 숨어 있으며 이름도 없으나, 무릇 道만이 만물을 가꾸고 이룬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상사문도 근이행지 중사문도 약존약망 하사문도 대소지 불소부족이위도) 

 

  공자는 <논어>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는 상급이요, 배워서 아는 자는 중급이요,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배우는 자는 중하급이요, 어려움을 겪은 후에도 배우지 못하는 자는 하급이다”라 하며 사람의 성품을 나누었다. 上士, 中士, 下士와 닮은 꼴이 없지 않다 하겠다. 그러나 佛家에서는 사람의 성품은 본디 평등하다고 한다. <열반경>에 이르길, “一切衆生悉有佛性(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녔다)”이라 하였다. 훗날 선종의 6조가 된 혜능이 집을 떠나 5조 홍인 선사를 처음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홍인 화상이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무엇을 구하고자 이렇게 찾아왔느냐?”

“제자는 영남 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스님을 찾아뵈온 것은 다른 무엇을 구함이 아니고, 다만 부처 되는 법을 구할 따름입니다.”

  홍인 화상이 짐짓 꾸짖으며 말씀하시길,

“너 같은 영남의 야만인이 어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에야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야만인인 저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이렇듯 모두의 성품은 평등하나, 번뇌에 뒤덮인 중생은 道를 얘기하면 크게 비웃을 따름이다. 한마디로‘귀신 씨나락 까먹는’얘기인 것이다. 허나 이는 돌을 금으로 착각하고, 도둑을 자식으로 삼는 어리석음에 다름 아니다. 그런 고로, 이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크게 웃지 않으면 역설적으로 道가 아니라는 것이다.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健德若偸 質德若渝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고건언유지 명도약매 진도약퇴 이도약뢰 상덕약곡 대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덕약투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도은무명 부유도선대차성) 

 

  無明과 渴愛로 눈이 흐려진 사람에게는 밟음이 오히려 어둠으로 비치고, 나아감이 물러감으로 보인다. 그래서 道를 권하면 받아들이기는커녕 비웃고 물리친다. ‘골짜기’는 道의 상징으로 이제껏 인용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갓난아기도 상징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으므로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한다. 어리석은 하사의 사람에게만 밟음과 어둠이 전도되어 비치는 것은 아니다. 실상 道를 섬기는 상사의 눈에도 밟음은 어둠으로 비친다. 즉 어둠이 밝음이고 밝음이 어둠이며, 나아감은 물러섬이요 물러섬이 나아감이다. 물론 하사의 경우에는 분별지의 전도망상(顚倒妄想)이며, 상사의 경우에는 무분별지의 진여무심(眞如無心)이지만.

 

  아주 큰 소리는 귀를 먹게 하므로 아예 들리지 않고, 아주 큰 형상은 인간의 눈으로써는 그 실상을 파악할 수가 없다. 그리고 아주 큰 그릇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大器晩成은 대체로 ‘늦게 이루어지는 큰 인물’을 뜻하는데, <도덕경>에서의 실제 의미는 그 끝을 알 수 없으므로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돌아올 줄을 모르는 통설(通說)은 분별지이며,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며 늘 되돌아가는 역설(逆說)은 가히 무분별지라 할 수 있는데,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으므로, 눈에 띄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道가 만물을 가꾸고 이루는 것만큼 큰 역설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