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42장. 하나는 둘로 둘은 셋으로

slowdream 2007. 8. 11. 01:25
 

<제 42장. 하나는 둘로 둘은 셋으로 셋은 만물로 펼쳐진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道는 하나로 펼쳐지고, 하나는 둘로 펼쳐지고, 둘은 셋으로 펼쳐지고, 셋은 만물로 펼쳐진다. 만물은 陰을 등에 업고 陽을 가슴에 안았다. 사람들은 고아, 짝 잃은 사람, 하찮은 사람이 되기를 꺼리지만, 이는 천자와 제후가 스스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 까닭에 잃음이 얻음이 되기도 하며, 얻음이 잃음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를 나 역시 가르친다. 광포하고 거친 자는 제명을 누리지 못하므로, 이를 나의 으뜸된 가르침으로 삼을 것이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여기서 ‘하나’는 道인 太極이 아니라 德인 氣이다. 그리고 氣는 음과 양의 둘로 펼쳐지는데, 음은 無名의 세계로 밤, 양은 有名의 세계로 낮을 뜻하기도 한다. 낮에는 모든 사물이 고스란히 제각기 차별적인 모습을 드러내지만, 밤에는 사물은 존재하되 그 차별을 확인할 수 없는 무차별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음기와 양기가 서로 어우러져 충기(沖氣)로 펼쳐진다. ‘둘은 셋으로 펼쳐지고’에서 ‘셋’은 음기와 양기, 그리고 충기를 가리킨다. 만물은 음을 업고 양을 품고 있는데, 말하자면 해와 달, 낮과 밤처럼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상대적인 음과 양을 동시에 존재케 하는 것은 바로 조화로운 충기의 힘이라는 것이다. <주역>의 이치를 빌려 말하자면, 충기는 사상(四象) 즉 태양[ꁍ]ㆍ소양[ꁏ]ㆍ소음[ꁎ]ㆍ태음[ꁐ] 가운데 음과 양이 하나씩 섞인 소양과 소음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태양[양], 태음[음], 충기[음양] 이렇게 셋이다. 말하자면, 천(天), 지(地), 인(人)의 3재(三才)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상이 어우러져 만물이 펼쳐진다. <주역>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의 숫자는 11,520이므로, 여기에서 ‘萬物’이 비롯한다.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인지소오 유고과불곡 이왕공이위칭 고물혹손지이익 혹익지이손 인지소교 아역교지 강량자부득기사 오장이위교부) 

 

  앞 문장과 의미의 연관이 뚜렷치 않다. 어쨌든 보통 사람들이 꺼리는 것도 지배자는 별로 개의치 않으니, 낮추면 높아지고 높이면 낮아지므로, 손해를 보는 것이 곧 이익을 보는 것이고 이익을 본다는 것이 곧 손해를 본다는 그런 의미인 듯싶다. 强梁者는 곧 유위를 가리킨다 하겠다. 결국 얻고자 하는 유위行은 잃을 것이고, 잃고자 하는 무위행은 역설적으로 얻는다는 것이다. 이는 佛家의 하심(下心)과도 맥이 닿는다. 下心은 한마디로 나[我相, 自意識]에 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모든 욕망과 번뇌가 나를 세계의 중심에 놓고서, 너와 나를 가르는 데서 비롯한다. 그리하여 시비와 득실이 펼쳐지고, 늘 선택의 갈림길에서 배회해야만 한다. 길위에서 길을 묻는 고달픔이라니.

 

  30장에 인용한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소동파는 당송 8대가 중의 하나로 꼽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시든 서화든 학문이든 모든 방면에서 재주가 뛰어났다. 타고난 성품도 호인이었으나, 종종 지나치게 오만불손한 까닭에 필화사건에 휘말리고 귀양살이를 겪는 등 삶이 순탄치는 못하였다. 그 좋은 일례로, 소동파는 평소에 누가 성 씨를 물으면, “칭(秤) 가요”라고 거들먹거리며 대꾸하는 버릇이 있었다. 칭은 저울이라는 뜻이므로, 자신이야말로 세상 만물을 가늠하는 잣대라는 지독하게 뿌리 깊은 자부심이다. 소동파는 불교에도 식견이 깊었던 터라, 하루는 옥천사라는 절에 들른 김에 승호(承皓) 선사를 친견했다.

“존함이 어찌 되는지요?”

선사가 묻자, 소동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칭 가요.”

“칭 가라니요?”

“천하 선지식을 저울질하는 칭 가란 말이외다.”

  예의 버릇대로, 자신은 너희 선지식들이라 불리는 부류들의 법력을 달아보는 저울이라는 아주 거만하기 짝이 없는 비웃음이었다.

“할!”

  승호 선사가 난데없이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자, 소동파는 별 웃기는 놈이 다 있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사가 나지막히 물었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몇 근이나 되겠소?”

  천하의 박식한 소동파라 해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 후 아상(我相)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던 소동파는 상총(常聰) 선사를 친견하고 법문을 구했다.

“어찌 무정설법은 듣지 못하고 유정설법만 들으려 하는고?”

  선사는 이 말을 건네고 지그시 바라만 보았다.

  무정설법(無情說法)이란 돌과 나무와 같은 무정물이 설법을 한다는 뜻으로, 상총 선사는 분별지의 알음알이로 불법의 이치를 캐는 유위의 지식인에게 화두를 건넨 셈이었다. 앞뒤 생각이 꽉 막힌 소동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무정설법’하나만 마음에 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폭포 근처를 지나는데 막혔던 마음이 확 열리는 것이었다. 소동파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게송을 읊었다.


溪聲便是長廣舌   계곡 물소리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이요

山色豈非淸淨身   산의 모습은 어찌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이 아니겠는가

夜來八萬四千偈   밤새 읊는 팔만 사천의 게송을

他日如何與似人   다른 날 그대에게 어떻게 전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