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48장. 온갖 있는 것을 비우기 원할지언정

slowdream 2007. 8. 11. 01:28
 

<제 48장. 온갖 있는 것을 비우기 원할지언정>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배움의 길은 날로 쌓아가는 것이며, 道의 길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무위의 경지에 이른다. 무위는 못함이 없는 함이다. 천하를 다스림은 무위로써이며, 유위로써는 부족하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20장의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47장의“멀리 나갈수록 참된 앎이 적어진다”와 같은 내용이다. 세간의 지식은 쌓을수록 인정을 받는다. 교수, 회계사, 판검사 등 전문자격증은 곧 경제적 능력과 동일시된다. 또는 전문적 지식이 없어도, 경제적 능력이 탁월하면 그것이 곧 전문적 지식으로 탈바꿈된다. 그리하여 경제적 능력은 지식이며, 인격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환금성(換金性)이 약한 지식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 우스꽝스럽지만 이것이 현실의 길이다. 그러나 道의 길은 전혀 다르다. 쌓음이 아니라 비움의 철학이다. 지식을 비워낼수록 지혜는 날로 깊어진다. 세간의 살림살이는 늘어날수록 뿌듯하지만, 출세간의 살림살이는 비울수록 넉넉해진다. 41장에서 ‘어리석은 이가 크게 웃지 않으면 道가 아니다’라 했듯, 道의 길은 주위의 인정이 아니라 비웃음으로 덮여 있다. 헛된 꿈이니, 비현실적이니 하며 조소한다. 이는 본말(本末)이 뒤집히고 주객(主客)이 뒤바뀐 것이다. 옛말에 “십 리를 가는 자 한 끼로 족하고, 백 리를 가는 자 며칠 끼니를 준비해야 하며, 천 리를 가는 자 한 달치 식량을 준비해야 한다” 하였으니, 道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세속의 인정 따위에 어찌 덜미를 잡히겠는가.


但願空諸所有   다만 온갖 있는 것을 비우기 원할지언정

愼勿實諸所無   온갖 없는 것을 채우려 하지 마라

好住世間       즐거이 머문 속세

皆如影響       모두가 그림자와 메아리 같도다


  중국 당나라 때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다. 방거사는 마조 선사의 제자로, 마조 스님께 “온갖 법과 짝하지 아니하는 이는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마조 스님의 “네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버리면 가르쳐 주마”라는 대답에 바로 깨쳤다. 방거사는 상당한 부호였는데, 그 길로 모든 재산을 호수에 빠뜨려 버렸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자식들의 만류에, 그는 재물은 탐욕을 부른다며 단호하게 뿌리치고, 돗자리를 팔아서 생계를 이었다. 자신은 물론 부인과 딸, 아들 모두 불법을 체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거사(居士)는 ‘마음은 출가했으나 몸은 출가하지 않은 불제자’를 뜻하는데, 佛家에서는 3대 거사로 부처 생존시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 신라의 부설거사(浮雪居士), 그리고 방거사를 꼽는다.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취천하상이무사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천하를 얻거나 다스린다는 얘기는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이름을 세상에 떨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세속의 유위법이며, 여기서는 깨달음을 가리킨다. 무위는 無不爲이므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