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장. 내 몸으로 타인의 몸을 보고>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修之於身 其德乃眞 修之於家 其德乃餘 修之於鄕 其德乃長 修之於國 其德乃豊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道를) 굳게 뿌리 내린 사람은 뽑히지 않고, 확실하게 품은 사람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 자손들이 제사를 줄곧 지낸다. 몸에서 道를 닦으면 그 德이 참될 것이고, 가정에서 닦으면 그 德이 넉넉할 것이고, 고을에서 닦으면 그 德이 크게 자랄 것이고, 나라에서 닦으면 그 德이 풍요해지고, 천하에서 닦으면 그 德이 널리 퍼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몸으로 타인의 몸을 보고, 내 가정으로 타인의 가정을 보고, 내 고을로 다른 고을을 보고, 내 나라로 다른 나라를 보고, 나의 천하로 다른 천하를 본다. 천하가 어떤지를 내 어찌 알겠는가. 바로 이를 통해서이다.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선건자불발 선포자불탈 자손이제사불철)
아무래도 이 장은 다른 사람이 노자의 이름을 빌려 덧붙인 듯싶다. 道를 섬기고 무위의 삶을 꾸리면 그뿐이지, 자손이 제사를 꾸리는 문제가 튀어나올 것은 또 무엇인가. 제사는 儒家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다. 노자의 입장에서는 제사 또한 허례에 지나지 않다.
<장자>에 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장자 부인이 죽자, 혜시가 문상을 갔다. 헌데 장자가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힌 혜시가 짐짓 나무랐다.
“그대와 함께 살면서 아이를 기르고 늙다 죽었는데, 곡을 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노래를 부르는 건 좀 심한 거 아닌가?”
무심한 표정으로 장자가 대꾸하기를,
“그렇지 않네. 처음에야 낸들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헌데 그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래 생명이란 없었네. 생명뿐만 아니라, 형체도 氣도 없었네. 무엇인가 혼돈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되었고, 기가 변해 형체가 되고, 형체가 변해 생명이 비롯한 것일세. 그러다 또 변해서 죽음이 된 것이지. 이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이 운행하는 것과 같다네. 지금 그 사람은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내가 곡을 하며 운다면 천명에 통하지 못함이 분명하니 그친 것일세.”
修之於身 其德乃眞 修之於家 其德乃餘 修之於鄕 其德乃長 修之於國 其德乃豊 修之於天下 其德乃普(수지어신 기덕내진 수지어가 기덕내여 수지어향 기덕내장 수지어국 기덕내풍 수지어천하 기덕내보) 儒家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道를 섬기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 고을, 나라,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지만 별로 마뜩치 않다.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고이신관신 이가관가 이향관향 이국관국 이천하관천하 오하이지천하연재 이차)
以身觀身를 예로 들면 여러 해석이 가능한데, 필자는 ‘먼저 내 몸을 닦고 나서 다른 사람을 살피라’로 옮긴다. 그런 즉 以家觀家는 내 가정을 먼저 살피고 다른 가정에 관심을 가지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노자가 줄곧 강조해 왔듯, 저 밖 풍경에 던진 눈길을 자기 마음으로 돌려잡으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道를 섬기는 사람은 시비와 분별로 얼룩진 세상사에 일일이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道를 깨치고 난 다음이면 모를까. 그리하여 佛家에서는 대승불교의 궁극적인 지향을 ‘自利利他 自覺覺他(모두가 깨닫고 열반의 기쁨을 나눔)’ ‘上求菩堤 下化衆生(위로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함)’이라 하지 않는가. 내가 깨닫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중생이 같이 깨닫도록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다. 中道에 입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얘기이겠다. 어쨌든 나라와 천하 걱정을 하기 전에, 일단 내 걱정부터 해야 하는 게 순서이다. 그런 까닭에 내 몸부터 관(觀)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 즈음에 제자인 아난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무엇에 의지하오리까”하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사념처(四念處)에 의지하라”고 하셨다. 사념처는 몸[身]과 감각[受], 마음[心], 마음의 대상[法]을 관찰[觀]하는 수행법이다. 첫째, 신념처는 자신의 몸과 관련된 현상, 즉 호흡과 동작 등을 관찰하여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탐욕을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즉 육신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국 죽어서 썩을 부정(不淨)한 것이므로 애착할 것이 못된다는 가르침이다. 둘째, 수념처는 느낌의 세계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감각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깨달아 즐겁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실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적 즐거움들은 우리 마음을 더럽히고 흔들어 본래의 성품을 보지 못하게 한다. 셋째, 심념처란 마음의 세계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마음은 늘 대상에 따라 변화하고 생멸하는 무상한 것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란 항상된 듯 보여도 끊임없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으며 안팎에서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옮겨잡듯 수시로 바뀐다. 넷째, 법념처란 정신적 대상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모든 존재는 영원한 자아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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