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61장. 스스로를 낮추면 얻는다

slowdream 2007. 8. 11. 01:39
 

<제 61장. 스스로를 낮추면 얻는다>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所欲 大者宜爲下


큰 나라는 아래로 흘러 천하의 모이는 곳이 되고 천하의 여인이 된다. 여인은 고요함으로써 남성을 이기며 아래가 된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작은 나라를 얻으며, 작은 나라는 큰 나라 아래로 낮춤으로써 큰 나라를 얻는다. 그런 까닭에 하나는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얻고, 또 하나는 아래이기 때문에 얻는다. 큰 나라는 모름지기 작은 나라를 집어삼키려는 과욕을 부리지 말고 사람을 두루 모아서 양성해야 하며, 작은 나라는 모름지기 큰 나라와 하나되려는 과욕을 부리지 말고 사람을 섬겨야 한다. 무릇 두 나라가 원하는 바를 얻자면, 큰 나라가 마땅히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所欲 大者宜爲下(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 빈상이정승모 이정위하 고대국이하소국 즉취소국 소국이하대국 즉취대국 고혹하이취 혹하이취 대국불과욕겸휵인 소국불과욕입사인 부양자각득소욕 대자의위하)

 

  8장의 ‘上善若水’의 의미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 적용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道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치고는 어설프다. 노자 또는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그 누군가의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道家의 입장이라기보다는 儒家의 입장에 가깝다. 정치경제에 있어서 나라와 나라, 기업과 기업 사이의 역학관계에 조언이 될 수는 있겠지만, 냉정한 현실에 비추어보자면 부정적이다. 고요함, 하심(下心)이 관계의 초석이라는 정도의 의미만 건질 수 있겠다.

 

  당나라 때 불법에도 밝고 여러 학문에도 뛰어난 협산(夾山)이라는 스님이 법문을 설할 때면 대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날도 다름없이 대중들이 법당과 마당에까지 꽉 차서 협산 스님의 법문을 경청했다. 한 사람이 스님에게 물음을 던졌다.

 

“어떤 것이 법신(法身)인지요?”

“법신에는 상(相)이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법안(法眼)인지요?”

“법안에는 티끌이 없습니다.”

 

  거침없는 협산의 답변에 대중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헌데 구석자리에서 허름한 승복을 걸친 한 노스님이 실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협산은 내심 언짢을 만도 한데, 아무 내색없이 노스님에게 다가가 예를 갖췄다.

 

“스님, 제 답변이 잘못되었는지요?”

“틀린 데라고는 없으나, 안타깝게도 스승의 가르침이 없네.”

“소승에게 눈 밝은 스승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가르쳐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대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니 마음에 걸리네. 이름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가르쳐줌세.”

 

  협산은 그 길로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명예와 지위를 벗어던지고, 노스님이 귀띔해 준 대로 길을 떠났다. 마침내 어느 강가에 이르러, 나룻배를 부리는 늙은 사공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 사공이 바로 노스님이 귀띔해 준 천하의 눈 밝은 스승이었던 것이다.

뱃사공이 대뜸 물었다.

 

“스님께선 어느 절에 머무르는 게요?”

“절이란 머무는 곳이 아니니, 머무르면 아닌 듯합니다.”

 

  그러자 뱃사공이 난데없이 협산을 걷어차 물에 빠뜨리고는 외쳤다.

“어서 말해 보시게, 어서!”

 

  협산이 물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간신히 숨을 토하고서 말문을 떼려 하자, 뱃사공이 노로 머리를 짓눌러 다시금 물속으로 밀어넣었다. 협산이 물밖으로 다시 머리를 내밀고 말을 하려 들면, 사공은 지체없이 노를 휘둘러 협산을 물속으로 밀어넣는 것이었다. 몇 번을 되풀이하자, 협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모든 것들이 깡그리 사라지고 텅 비어버렸다. 바로 그 순간, 협산은 홀연히 깨달았다.

 

  훗날, 협산 스님이 협산이라는 산의 영천선원에 있을 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협산의 경계인지요?”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봉우리 뒤로 돌아가고, 새는 푸른 바위 앞에 떨어진 꽃을 무는구나.”

 

  깨달은 경지가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협산 스님은 눈앞에 펼쳐진 협산의 경치를 무심히 설명한 것이었다. 

 

  고요함과 下心, 이는 머무르지 않는 머무름일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