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59장. 거�으로써 도에 복종하며

slowdream 2007. 8. 11. 01:38
 

<제 59장. 거둠으로써 道에 복종하며>


治人事天 莫若嗇 夫唯嗇 是謂早服 早服謂之重積德 重積德則無不克 無不克則莫知其極 莫知其極 可以有國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柢長生久視之道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일에 거두는 일만한 것은 없다. 이를 일찌감치 道에 복종한다고 일컫는다. 일찌감치 道를 따르는 것은 德을 거듭 쌓는 것이다. 德을 거듭 쌓으면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다.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으면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그 끝을 알지 못하면 가히 나라를 가질 수 있다. 나라의 어머니를 모시면 영원하다. 이를 가리켜 뿌리가 깊고, 바탕이 튼튼하며, 영원하며, 변함없이 보는 길이라고 한다.

     


治人事天 莫若嗇 夫唯嗇 是謂早服 早服謂之重積德 重積德則無不克 無不克則莫知其極(치인사천 막야색 부유색 시위조복 조복위지중적덕 중덕덕즉무불극 무불극즉막지기극) 

 

  人은 다스림의 대상인 자기 밖의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노자는 人과 民을 구분해서 쓰기도 하고 종종 혼용하기도 하는데, 人은 고대 중국의 지배계층이며, 民은 피지배계층이다. 嗇은 곳간에 보리를 수확해서 저장하는 모양이 어원인데 ‘아끼다, 인색하다’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허나 필자는 씨를 뿌리고 열매가 맺히면 수확해서 저장하고, 다시금 그 씨를 뿌린다는 그 자연의 이법인 ‘순환’에 의미를 둔다. 그런 즉, 현상계의 反과 그 이법인 中道를 비유한 것으로 확인한다. 그래야 ‘일찌감치 도를 따르다’와 맥락이 이어진다고 본다.

 

  早는 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는 때로서, ‘미리, 급하게, 서둘러’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지금도 늦지 않았고, 오히려 빠르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시작이 반이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 아니겠는가. 極은 양단(兩端)이며 이변(二邊)으로, 有의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德은 무위이므로 상대법적인 존재의 모순관계를 극복한 것인 바, 양단과 이변하고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莫知其極 可以有國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柢長生久視之道(막지기극 가이유국 유국지모 가이장구 시위심근고저장생구시지도) 

 

   ‘나라’는 ‘천하’로 이해하는 게 더 좋아 보인다. 천하를 낳게 한 어머니 즉 道를 섬김으로써, 유한한 유위의 삶은 마감하고 영원한 무위의 삶이 펼쳐진다. 뿌리가 깊고, 바탕이 튼튼하며, 그런 까닭에 영원하고, 변함없이 보는 길이 바로 무위이다. 極은 有이고, 나라는 無, 어머니는 道의 비유이다.

 

  <서장>의 저자인 대혜 선사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법문을 설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를 오늘 다시금 새롭게 듦은 조주의 관문을 뚫고 다만 특별히 현묘한 말을 찾기 위함이라. 감히 여러분께 묻노니, 이미 조주의 관문을 뚫었거늘 무엇 때문에 현묘한 말을 찾겠는가?”  

  대혜 선사가 잠시 침묵을 지킨 후에 다시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다만 풀의 길고 짧은 것을 의심했으나, 불로 태우고 난 후에 그 땅이 고르지 않음을 알았느니라.”

  이병(李邴)이라는 제자가 법문 끝에 홀연히 깨닫고서 선사께 말씀드리길,

“뒤에 하신 말씀이 없었다면 제가 또한 실수할 뻔했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는 앞에서 언급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無자(字) 화두의 주인공 조주 선사의 또다른 화두이다.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달마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祖師西來意)?”하고 묻자, 조주 선사가“뜰 앞의 잣나무이니라(庭前柏樹子)”라고 대답한 데서 연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