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58장. 사람의 미혹됨이 참으로 오래되었네

slowdream 2007. 8. 11. 01:37
 

<제 58장. 사람의 미혹됨이 참으로 오래되었네>


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日固久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燿


정치가 흐리멍텅하면 백성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똑똑하면 백성이 어리석어진다. 화에서 복이 나오고 복에서 화가 나온다.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일정한 것은 없다. 올바른 것이 뒤집혀 이상한 것이 되며, 선함이 뒤집혀 요망한 것이 된다. 사람의 미혹됨이 참으로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성인은 방정하지만 쪼개지를 않고, 날카로우나 잘라내지 않고, 곧으나 펴지 않으며, 빛나나 눈부시게 하지는 않는다. 



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기정민민 기민순순 기정찰찰 기민결결)

 

  57장에서 의미하는 바를 계속 연장시켜서 강조하고 있다. 또한 20장에서 “사람들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흐리멍텅하다”와 같은 의미이다. 17장에서 “가장 으뜸인 지도자는 백성이 그 존재만 아는 것이며, 그 다음은 백성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이다. 그 다음은 두려워하는 지도자이며, 그 다음은 업신여기는 지도자이다”라 했는데, 함께 견주어서 음미할 만하다.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日固久(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 숙지기극 기무정 정복위기 선복위요 인지미 기일고구)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복이 다하면 화가 닥치고, 화가 다하면 복이 찾아온다. 선하다고 여겼던 것이 이내 요망한 것으로 바뀐다. 영원히 천수를 누리고, 천복을 다하리라는 생각은 바로 상대법적인 세계의 통설이자 정설(正說)이다.  여기서 正은 일정하게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분별지이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결코 그렇지 않고 역설(逆說)적이다. 역설은 반(反)이다. 40장에서 “反者 道之動(되돌아감이 道의 움직임이다)”라 했는 바, 反의 의미는 여럿이다. 그 하나는 되돌아감이며, 다른 하나는 뒤집힘이며, 또 다른 하나는 되풀이다. 그리하여 道를 섬기는 사람은 복에 머물지도 화에 머물지도 않는다. 바름에 머물지도 않고, 기이함에 머물지도 않고, 선한 것에 머물지도 않고, 요망한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有에서 無로 無에서 有로, 끝없이 되돌아가고 뒤집힘이 되풀이되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22장에서의 비유 또한 같은 지평에 있다.“휘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펴진다.”

 

  사람의 미혹함이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수천 년 전 노자의 탄식이 오늘의 우리에게 공허한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생명체가 복제되고, 우주선이 태양계를 탐험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하는 오늘날, 과학물질문명은 끝을 모르고 치닫는데 정작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덕경>이 읽힌다는 사실은, 물질문명의 황홀한 세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道를, 참된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갈증이 여전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한 등불이 능히 천 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 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6조 혜능선사의 가르침이 우리의 타는 듯한 목마름을 적셔준다.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燿(시이성인방이불할 염이불귀 직이불사 광이불요) 

 

  세상의 이분법적인 통설에 물들지 않은 성인은 유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까닭에 자신은 방정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자르고 쪼개어서 방정하게 만들지 않는다. 자신은 곧으나 다른 사람에게 곧게 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은 빛나나 다른 사람에게 그 빛을 본받으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머지않아 돌아오고, 뒤집히고, 되풀이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佛家의 선지식이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도 이와 닮았다. 제자의 성품에 어울리는 화두 방편을 주고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깨달음은 스스로 증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이를 가리켜 줄탁(啐啄)이라 하는데, 啐은 달걀이 부화하려고 할 때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 啄은 어미 닭이 밖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가리킨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어 선지식이 제자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함을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