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와 액을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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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온(五蘊)과 공(空)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고(苦)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고,
공(空)과 오온(五蘊)을 이야기하자.
고(苦)는 범어로, Duhkhata(두카타)라고 한다.(원래 범어는 로마자에다가 위아래에다 줄도 긋고, 점도 찍어서 쓰는데, 나의 자판의 형편상 점과 줄을 치지 못했음.)
Duhkhata는 우리말로, '어긋난다, 맞지 않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럼 범어의 '어긋난다, 맞지 않는다'라는 말을 고(苦)라고 번역을 했을까?
어긋난다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 닥쳐오는 삶과(바깥의 삶과 내면의 삶을 통틀어서)
자신의 관념과의 관계에서 서로 어긋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관념은 항상 동일하다.
이 동일한 관념을 불교에서는 상(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은 거의가 자신이 살아오면서 한 두번 겪은 것에서 바람직한 것을 가지고
정형화 시켜놓은 것이다.
그리고 또 살아가면서 그 상에 걸 맞는 일들이 일어나면,
자신은 자신이 만든 상이 옳은 것인양 고무되면서
더욱 더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만든 상이 옳다고 더욱더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에 기초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상이라는 것은 과거에 기초한 것인데,
우리에게 닥쳐오는 삶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즉,
늘 현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형성된 상이
늘 새로운 현실과 잘 맞아떨어질 리가 없다.
물론 맞아서 기쁜 일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자신의 마음위에서 일어나는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마음과 현실이 자주 어긋난다.
그러니 마음이 아플 수밖에....
그래서 어긋난다는 것이 고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심경에서는
‘오온이 공함을 알고 일체의 고를 넘어간다.’
고 했다.
그러면 오온이 무언지를 알아야 한다.
오온은 우리가 하나의 의식(관념, 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을 말하고 있다.
색이란,
인식대상을 말한다.
인식대상에는 형상이 있는 것(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과 형상이 없는 것(사랑, 자비, 도, 진리, 그 외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이 있다.
그러나,
색의 상태는 우리가 인식되기 전의 상태이다.
예를 들어서 사과라고 하는 것이 이름 붙기 전의 상태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아니면, 사과라는 과일에 대해서 알기는 했어도 처음 본 상태라고 해도 좋다.
어떤 둥글고 빨갛게 보이는 어떤 것이 있다.
사과라는 어떤 과일이 있다.
이 것이 색이다.
수라는 것은,
어떤 둥글고 빨갛게 보이는 어떤 것을 보았다.
사과라는 과일을 보았다.
이 것이 수다.
상이라는 것은,
그것을 좀 더 자세하게 관찰을 하고
둥글고 빨갛고 또는 연두색과 녹색... 꼭지가 있고 등등으로 나름대로 그것에 대한 조금의 정의를 내린다.
그리곤,
‘아.... 사과라는 것이 실제로는 이렇게 생겼구나...’ 한다.
행이라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어떤 행을 한다.
즉,
칼로 깍거나, 입으로 베어 물거나, 씹거나 한다.
‘음... 달콤하고 새콤한 맛을 가지고 있고, 속에 물기가 많구나.’ 등등의 느낌을 가진다.
식이라는 것은,
그러한 앞의 행동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아....! 이것이 사과구나.’
이렇게 해서 사과라는 하나의 색이 자신에게 형상화 되고 관념화 되어서,
사과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
이 것이 바로 오온의 과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과는 똑 같은 사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한번 경험하여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관념이 생기면,
그 다음부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으로 재해석해서 봐버린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는 수많은 사과가 있고 또 저마다 조금씩은 다른 모습과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매번,
처음, 아니면 사과에 대한 자신 나름대로 완전한 지식이 생긴 그 상태의 관념으로 사과를 본다.
그리곤,
어떤 사과를 맛보면서 만약에 자신이 생각하는 사과의 것과 다르면,
‘에이 사과 맛이 왜 이래?’
하는 것이다.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맛과 같으면서 그것보다 더 진하고 자 극적이면,
‘우와~ 사과맛 죽이네...’
하고는 칭찬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사과가 몇 개가 있느냐 하면,
사과의 수만큼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수 만큼 사과가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저마다 각각의 사과라는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苦)라는 것은 ‘어긋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 보라.
작은 예이고,
사과의 맛이 틀리다고 해서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과 하나만 두고도,
맛이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때론 기뻐하고 때론 기분 나빠하지 않는가?
겨우 몇 개의 사과를 맛보고는 마치 사과의 모든 맛에 대한 견해를
자신만이 옳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삶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삶 속에서 경험한 것을 가지고,
마치 세상을 다 알고 있는 듯,
또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그렇게 되어야만 옳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자신이 잘 모르는 일 조차도,
자신의 관념과 짜 맞추어서 마치 그러한 일을 과거에 경험한 듯이,
늘 새로운 삶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어긋난다’는 말을 고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럼,
고를 어떻게 넘어가겠는가?
심경에서는,
오온이 공함을 본다고 했다.
즉,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오온이 공함을 보라고 한다.
오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온이 공함을 보라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오온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하나의 식(금강경에서는 상이라고 해서 이하 상이라고 함)이 생길 때에는,
하나의 대상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준 그 대상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때 만들어진 상이 지금 실재하는가?(물론 우리의 기억속에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그 상 역시 과거의 것이다.
이미 없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오온이 공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좀 관념적이어서 잘못하면 또 관념에 빠질 염려가 있다.
오온이 공하다는 말은,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고 그것에 대한 지식을 쌓고 있지만,
그것은 그 순간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일 뿐,
항상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집착하지 마라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이라는 것은,
오취온(五趣蘊)을 말한다.
오취온이라는 것은,
오온을 취한다는 것이다.
즉,
오온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인데,
대상이 사라지면,
그 대상으로 얻어진 오온 역시 사라진 것인데,
그것을 마치 진짜로 존재하는 양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취한 것을 가지고 하나의 잣대를 만들어,
삶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오취온과 맞으면 기뻐하고 맞지 않으면 힘들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이 공함을 보고 고액을 넘어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삶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잣대가
즉, 오취온으로 생긴 분별하는 그 마음이,
오취온으로 만든 상에 집착하는 그 마음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머물지 않는 바에 마음을 내라."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원래의 우리의 삶은 언제나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또 주위의 환경 역시 그러하여서 늘 물과 같이 흐른다.
그리고 한번도 같은 적이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상에 맞든 맞지 않든 상관없이 다가왔다 사라진다.
그러나 마음은 늘 과거에 머물러서,
과거의 기억 속에 있는 마음에 맞는 것의 잣대를 들고(상을 가지고)
분별 판단하니,
즉,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이쁜 것과 못난 것을 가리어서,
심지어 부처님의 말씀조차도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하여서,
그것에 머물려고 하니까,
(호오[好惡], 선악[善惡], 미추(美醜)등의 상을 세워서 가지고 있다는 말,)
잠시도 머물지 않는 현재의 삶과
과거의 기억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은(분별하는 상) 언제나 어긋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삶이라는 현장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어서,
자신이 원한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과 여건들에 의해서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바라는 마음과 현실은 언제나 어긋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원하는 현실이 늘 오지 않으니까,
삶이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자신이 세워놓은 상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데 현재의 삶은 그러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삶은 고해라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삶이 고해가 아니라,
역동하는 삶을 자신이 세운 상에 맞추려는 그 마음이 바로 고해인 것이다.
즉,
삶은 잠시도 머물지 않는데,
마음 저 혼자 삶에다가,
거룩하고, 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해놓고는,
삶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느니 선하느니 아름다우니 하는 잣대를,
마음 저 혼자 만들고,
거룩하지 않고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 역시
마음 저 혼자 지어 내어놓고는...
그리고 세상은 많은 사람과 만물이 다 저대로 주인공인데,
이 마음은 저 혼자만 주인공인줄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것만 일어나길 바란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과 만물이 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니,
한 사람의 마음에 그것이 맞아떨어지겠는가?
그런데도 이 마음이란 놈은 욕심이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고해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끝내 자신이 문제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괴롭지 아니하리요?
더군다나,
자신에게 조차도,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상을 만들어 붙여놓았으니
내가 있다는 그 한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늘 변하는 우리의 모습이어서,
어떤 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는 자신을,
늘 과거의 죽은 상속에 집어넣어 어떤 자가 되려고 하니
삶이 고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우리가 세운 그 상이라는 것이 공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봄으로서 고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 사구게에서
“모든 모양 있는 것은 범소유상(凡所有相)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개시허망(皆是處妄)
만약 모든 모양 있는 것이 모양 아닌 줄을 알면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곧바로 부처님을 보리라 즉견여래(卽見如來 )”
라고 한 것은 여래, 즉 부처가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모양있는 것이 모양이 아닌 줄 알면’
이라는 전제조건을 통과하면 모든 것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모양이라는 것이 바로 상이다.
우리가 매 순간 세상과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모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것이 사과다’ 라고 정해놓은 그 상을 모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부처는 이런 모습이어야 하고,
이러한 것은 착한 것이고,
저러한 것은 악한 것이고,
또
아름다운 것은 이런 것이고,
추한 것은 저런 것이고
이러한 모습은 좋은 것이고,
저러한 것은 나쁜 것이고
등등....
그렇게 세워놓은 관념을 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이 바로 오온에서 생겼으며,
오온이 공함을 알듯이,
그러한 상이 진정한 모양이 아님을 알면,
모든 모양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임을 알면,
매순간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바로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니,
‘즉견여래(卽見如來) - 곧 부처를 보리라.’
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것을 관자재보살은 보신 것이다.
그래서 고액을 넘어가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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