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 )
행심반야바라밀다시 (行深般若波羅蜜多時)
풀이를 하면,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로 풀이 할 수가 있습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곧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관자재보살은 범어의 “아바로키테시바라(avalokitesvara)"(범어는 알파벳에 부호를 붙여야 하는데... 한국의 자판은 그것이 안 되어서 생략했음.) 라고 하는 것을 한역(漢譯) 한 것입니다.
원래 현장법사보다 250여 년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인도승인 구마라습(鳩滅汁)이
관세음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후에 현장법사가 관자재라고 고친 것입니다.
아바로키테시바라는,
범어로 ‘지킨다’는 뜻의 ‘아바’와 ‘본다’는 뜻의 ‘로키타’와 ‘자재롭다’는 뜻의 ‘이스바라’가 합쳐져서 된 말이고, 자유자재로 지켜본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
구마라습이 말한 ‘관세음보살’보다는 현장법사의 ‘관자재보살’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다는 것에는 육안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見)
심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있는데,(觀)
자재보살이 보는 것은 심안으로 보는 것이어서,
관이라는 해석이 맞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문을 쓰는 본 고장에 사는 현장이 관자재보살이라고 해석한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이라는 것은,
자재롭게 지켜본다는 뜻이고,
자재롭다는 것은,
누구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만물은 모두가 다 인연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조차도,
생명력 자체는 우리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영장이라고 한들,
자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투어진 상(相)을 가진 어떤 것도 스스로는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자재보살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이라는 것은,
심안으로 보는 것입니다.
심안으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요,
안다는 것은 즉 행함이요.
행은 즉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관자재보살이라는 것은,
자재하게 지켜보는 보살이고,
자재하게 지켜보는 보살은,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보살이니,
이미 알고 있는 보살이요.
안다는 것은, 이미 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이라는 뜻이요.
행한다는 것은, 주체가 있어야 행할 수 있으니
행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주체라는 것이니,
바로 존재자체라는 뜻입니다.
다만 자성이 인격화되어서,
보살의 모습으로 은유 되었다는 것일 뿐입니다.
굳이 나눈다면,
자성을 아는 자,
즉, 깨달은 자라는 말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성을 알았다는 것이며,
자성이 바로 자신임을 안다는 말거든요.
그럼,
자신이 바로 자성이라는 것입니다.
자성과 자신이 한 치도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은 자이며,
자성과 자신이 한 치도 떨어진 적이 없으니,
자신이 바로 자성이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성이라고 막연히 이야기하면,
자성이라는 말을 누구나 듣고 말하고 하는 말이기에,
그냥 자신이 듣고 배운 대로 이해할 뿐이거든요.
그래서 자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자성이라는 것은,
한자로, 自性,
즉,
스스로의 성품입니다.
스스로의 성품이라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자재하는 성품,
그것을 일러 자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성(깨달음을 구하는 자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이 이 단어... 자성(自性)......).
그럼 도대체 자성이 어디에 있을까요?
도대체 어디에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목이 매여서 구하고 있을까요?
그것을 구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드라마틱하게 이야기하려면,
내가 진리를 찾아온 세월만큼이나 많이 늘어놔야 하겠지만,
사실, 알고 나면 너무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우리는 자성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니,
바로 우리가 자성입니다.
우스운가요?
^^
나는 가끔씩 내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들 중에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거의 90%이상이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하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온 세상에 두루 편재하면서 우리를 구제한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물어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두루 편재하지요?”
“네”
“그럼, 똥 속에도 하나님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거의 백 프로가 다 불쾌한 듯이 나를 떠나갑니다.
후후......
오히려 그것이 나에겐 편합니다.
왜냐하면,
골치 아프게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가 없고,
또 논쟁을 할 필요가 없거든요.^^
하지만,
한 번도 없었지만,
똥 속에도 하느님이 있다고 하는 기독교 신자가 있다면,
나는 그와 함께 열심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님들!
자성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존재하는 성품이 아닙니까?
님들 스스로 존재합니까?
님께서 어디를 가자고 하면서 걸음을 떼어놓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합니까?
계속 오른발 떼고 왼발 딛고,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오른발 밑에 뭔가...... 음... 그것을 무시하고 이쪽 근육을 움직여, 그리고 저쪽 근육을 움직여야지., 음.... 잘했군, 그리고, 들어서 저곳에 놓아, 음, 그것을 놓았으면 야! 왼발...”
이렇게 걸어갑니까?
아니지요?
아니,
전 그렇게 못하니까, 님들에게 묻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못하니까요.
그리고 이런 물음을 여러 사람들에게 하니까.
죽어도 그렇게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 것은 누가 합니까?
그것뿐만 아닙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비록 생각이 ‘이렇게 하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다음은 생각이 책임집디까?
그냥 그렇게 하지 않아요?
그것을 무엇이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님들이 한다고요?
하하하하.......
그렇게 바쁘게 살라고 한다면,
아마,
내 앞에 저질러져 있는 문제만 해도 죽겠는데,
내 몸마저 내가 다 이리저리 명령을 해야 산다면,
하하하.............
저 같으면 안 살고 말거에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무엇인가가,
그렇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성의 힘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의 한계가 너무나 보잘것없습니다.
그 이상을 책임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자성의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품입니다.
그것을 신, 또는 불성, 또는 부처, 진여.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습니다.
다만,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삶을요.......
우리가 태어날 때에 우리의 힘으로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죽을 때에 내가 원해서 죽습니까?
아니 크게 보지 말고,
우리의 작은 삶에 들어와서 봐도,
님들이 잠이 올 때에 님들이 잠이 와라 해서 옵니까?
님들이 잠을 자면서 침을 흘릴 때에 자면서 음.... 침을 흘려라 해서 흘립니까?
님들이 배가 고플 때에 님이 배가 고파라 그래서 신호를 보내라 해서 배가 고파집니까?
님들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깎고 난 후 시간이 지난 뒤에 머리가 자랐습니다.
그것도 님께서 하신 것입니까?
님께서 변을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에 님께서 신체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고,
음..... 이제 때가 되었군 하고, 화장실에 가라고 합니까?
도대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조차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러한데도 우리는 너무나 엄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성의 힘입니다.
기독교에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라고 하지요.
이처럼,
우리는 자성을 떠나선 찰라 간이라도 존재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
찰라 간이라도 자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의 온 구석구석이 자성으로 꽉 채워져 있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똥 속에도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주의 텅 빈 공간이나 우주에 산재되어 있는 삼라만상의 속속들이
모두 자성으로 꼭꼭 채워져 있는 것이 자성입니다.
즉, 모양만 이렇게 저렇게 변화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날 뿐이지
그것이 존재하고 그런 모양을 짓고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이 자성에 의해서 그렇게 되고
또 그러한 모양들 구성하고 있는 재료까지도 자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삼라만상이 모두 자성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성은 허공과 같으며 허공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또한 자성을 떠날 수 없어서
허공 속의 모든 것 역시 자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성은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들이 다 있는 것이 바로 자성입니다.
그래서 자성을 일러 일심(一心)이라 하며,
텅 빈 허공을 일러 진여문(眞如門)이라 하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과 그것들이 인연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법성계를 생멸문(生滅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 두 문을 합하여 일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바로 우리가 자성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즉 알음알이를 낸다는 것이지요.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러합니다. 그 업장이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거든요.)
하지만, 이것을 생각해보셨는지요.
자성의 힘이 없다면,
우리가 태어날 수도 없고,
태어나서 살아갈 수도 없고,
그러면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을요.
그처럼!
의문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 역시 자성의 힘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때론 우리의 의지로 생각을 하고 움직이고 의문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거의 대분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각이 일어나고 행동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가 있다면
왜 자신이 스스로 쥐어뜯을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의지를 벗어나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까지도 관장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성인 것입니다.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자성이 있기에 허락이 되는 것이요.
자신이 중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자성이 있기에 허락이 되는 것이요.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자성이 있기에 허락이 되는 것이요.
남과 시비를 할 수 있는 것도 자성이 있기에 허락이 되는 것이요.
싸움도 자성이 있기에 할 수가 있고,
욕도 자성이 있기에 할 수가 있고
죽고 싶은 마음도 자성이 있기에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자성이 있기에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삶에 관련된 자성을 이야기했는데,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우리의 육체는 마르고 썩어서 나중에는 백골로 남고, 더욱 지나면,
아무 것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것을 누가 합니까?
죽고 난 뒤의 자신이?
아니지요.
결코, 이렇게 쓰는 저도 못할 뿐 아니라,
이 글에 대해서 토를 달고 싶은 분조차도 도저히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라는 생각의 영역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우리는 자성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즉,
우리가 한 번도 자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면,
또,
우리의 모든 삶과 죽음이 바로 자성의 발현이면,
우리가 바로 자성이 아닙니까?
그러면,
관자재보살 또한 자성의 발현이니,
우리가 바로 관자재보살이 아닙니까?
이런 말을 하면,
또,
지식을 많이 가진 자일수록 의문을 가지고 알음알이를 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의문이라는 것은,
자성이전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성이 있고,
삼라만상이 생겼고,
삼라만상 중에 또한 내가 생겼고,
내가 생기고 난 연후에 의문이 생겼으니,
의문이 자성을 넘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문이 있건 없건 자성이 이미 있다는 것이요,
진리는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에 비로소 진리가 늘 그 자리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뒤에 온 자가, 먼저 온 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알음알이에 가려서,
진리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뒤에 온 자가 먼저 온 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온 자를 구해야 합니까?
(구한다는 말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다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 사실 믿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자신이 자신임을 믿는다는 소리와 같으니까요,
하지만, 그동안 속아왔기 때문에 그 속은 마음을 내버리기 위해선 믿는 마음이 있어야겠지요.
아니면 뒤에 온 자를 거짓임을 알고 내 버려둬야 합니까?
저를 비유해서 다시 말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살아온 삶의 기반에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저를 비유해서 다시 말합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고 있지만,
이것은 제 생각이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다고 봅니까?
어제는,
머리를 감은지 하루가 지나서 머리가 뻑뻑해져서 머리를 감았습니다.
머리가 뻑뻑해진 것.
내가 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알고 감은 것.
물론 내가 의식하였지요.
하지만,
그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다른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지만,
그래도 열심히 머리를 감았거든요.
그것은 도대체 누가 했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있기에 제가 여기에 글을 올릴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힘은,
제가 못났을 때에는 못난 대로,
잘났을 때에는 잘난 대로,
다 받아줍니다.
그래서 자성은 허공과 같습니다.
우리가 습에 의해서 길들여진 생각이나 감정, 행동들이 가지는 어떤 의미와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과 변화에 대해선
자성은 도대체가 관심이 없습니다.(의미를 두고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에는 우리가 볼 때에는 악인도 존재하는 것이요,
선인도 존재하는 것이요.
부처님도 존재하는 것이요. 데바닷다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존재하는 것이요. 예수를 판 유다 이스가리옷과 예수를 고발하고 처형한 율법학자들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성은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성이 허공과 같듯이 우리의 마음 역시 허공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역시 자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생각도 나오게 합니다.
다만,
그 생각을 옳다 그르다 하면서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분별 이전에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있나요?
어떤 생각이든 인연이 생기면 생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기에 나쁜 생각도 일어나고 좋은 생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텅 비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별하는 생각 역시 우리의 마음이 텅 비어 있지 않고
어떤 모양 예를 들어서 분별하지 않는 모양으로 있다면
절대로 분별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좋은 모양으로 있다면 나쁜 생각도 역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기 전에 이미 무수한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텅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성이 허공과 같듯이 우리의 마음도 허공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성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듯이 우리의 마음 역시 모든 생각을 다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마음이 바로 자성인 것입니다.
이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이어서
부처도 이 마음을 쓰고 중생도 이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심이 바로 불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부처는 분별이 없는데 반해
중생은 늘 자신이 한 일과 생각과 바깥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분별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바람에
번뇌를 일으켜 고통과 생사에 헤매이는 것이지요.
생사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인연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인연에 의해 생겼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있는데 그것들이 인연에 의해 조합되어서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난 다는 것이지,
없는 것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난 적도 없고 죽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면서,
그 대상에 대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일으켜 옳으니 그르니 하니까,
옳으면 따라가야 하고 그르면 없애야 하고,
또 따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없애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는 등의 무수한 생각을 잇달아 짓고 허뭅니다.
이렇게 분별에 매여서 생각을 짓고 허무는 것을 일러 생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별의 생각이라는 것은 물론 있는 현상을 보고 일으키긴 하지만,
그 분별의 상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성은 그 어떤 것도 옳다 그르다 하지 않고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이 실상으로 존재하는 순간에는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분별의 상은 지금에 있는 것이 아닌 과거의 생각으로 만든 잣대이거든요.
그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잣대로, 찰라지만 현재에 존재하는 실재의 것을
옳으니 그르니 하고 규정하고는
따라가야 하느니 없애야 하느니 하면서 생각에 생각을 덧붙이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따라다니는 꼴이지요.
실체는 모양이 바뀌어도 실체입니다.
그래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체는 생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자들이요, 삼라만상이 다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분별하는 생각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믿고 생각을 만들고 허물고 있으면서
고통에 빠져 사니 생사에 헤맨다고 하는 것입니다.
분별이 없으면 일어나고 사라질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인연에 의해서 흘러가고 변화할 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요 자성의 삶인 것입니다.
그처럼 자성이 있어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하고,
또 자성이 모든 것을 품어 안는데
우리가 따로 어떤 것이 옳다고 하면서 가치를 가지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그러합니다.
우리가 따로 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로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는,
이미 너와 내가 없는 자이니,
갈등이 없지만,
그래도 구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자는,
구할 것이 있는 것처럼 버릴 것이 있으니,
세상사에도,
옳고 그름이 생겨서,
착한 자와 그른 자가 보이게 되고,
예쁜 자와 못난 자가 보이게 되지요.
그러면,
버릴 것이 있고 가질 것이 생기게 되고,
그 속에 미움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고,
미움보다는 사랑이 나으니까,
사랑을 찾으려는 수행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고통과 번뇌가 일어나서 생사에 헤매는 것이지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는
바로 관자재보살이 이러한 자성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관자재보살이라는 말입니다.
반야심경의 일편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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