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반야심경

2. 행심반야바라밀다시

slowdream 2007. 9. 8. 05:48
 

반야심경 2 (행심반야바라밀다시)



"행심반야바라밀다시 (行深般若波羅密多時)"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실 때에"


....................................................


바라밀은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들이 수행하여야만 하는 덕목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대승불교에서 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6바라밀과 10바라밀이 있는데,


보통 바라밀(波羅密)이라고 하면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보시(布施),

계율을 지키는 지계(持戒),

어려움을 참는 인욕(忍辱),

깨달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정진(精進),

명상으로 정신을 안정시키는 선정(禪定),

모든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는 반야(般若) 등의

6바라밀(六波羅密)을 말한다.


관자재보살은 6바라밀 중에

모든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는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다.


보통 6바라밀 중에 앞의 다섯 가지의 바라밀은 실천을 말하고,

마지막 반야바라밀을 바른 인식을 말한다.


돈요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 보면,

(돈오입도 요문론은 마조선사(馬祖禪師)의 제자이신 대주 혜해선사(大珠慧海禪師)가 지었으며,

객승이 대주 혜해선사께 질문을 하고 스님이 답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라밀에 대한 혜해선사의 설법이 있다.


"이 돈오의 문은 어디로부터 들어갑니까?"

"단 바라밀(檀波羅密)로부터 들어가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육바라밀이 보살의 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까닭으로 단바라밀 하나만을 말씀하시며,

어떻게 구족하여야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미혹한 사람은 다섯바라밀이 모두 단 바라밀에서 말미암은 줄 알지 못함이니 오직 단바라밀을 수행하면 곧 육바라밀은 모두 구족한 것이니라."


"어떤 인연으로 단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단(檀)이란 보시(布施)를 말하느니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까?"

"보시는 두 가지 성품을 버리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 성품입니까?"

"선(善)과 악(惡)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며,

있음(有)과 없음(無)의 성품,

사랑함(愛)과 미워함(憎)의 성품,

공(空)과 공 아님(不空)의 성품,

정(定)과 정 아님(不定)의 성품과

깨끗함(淨) 깨끗하지 아니함(不淨)의 성품을 버려서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보시하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느니라.


만약 두 가지 성품이 공 함을 얻을 때에 또한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하며,

또, 보시한다는 생각도 짓지 아니함이 곧 진실로 보시 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니

만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고 하느니라.

만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지다 함은

곧, 일체 법의 성품이 공 하다는 것이니

법의 성품이 공 하다 함은 곧, 일체 처에 무심함이니라.


만약 일체 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는 한 모양(一相)도 얻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느니라.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다 함은 곧 진여의 실상이니 진여의 실상이란 여래의 묘한 색신의 모양이니라.


[금강경]에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모든 부처님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한 말이 있다.


즉,

진정한 바라밀을 분별하는 성품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의식구조를 보면,

(화를 내는 것을 예로 들자)


화를 내고는 자신이 화를 내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화를 내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그 행동이 좋은지 나쁜지 분별하고,

분별한 뒤에 좋으면 기뻐하고, 나쁘면 고뇌한다.

그리곤,

좋으면 계속하려고 하고, 나쁘면 그것을 고치려고 한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동시에 두 가지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가 날 때에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찰라 간이라도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자신이 화를 내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어떤 슬픔이 생기면, 그 슬픔이 계속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과정이 있다.

생각 - 생각사이에 슬픈 생각 - 또 다른 생각 - 슬픈 생각 - ....

이런 식으로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도 분별하는 마음이 슬픔에 집착하면서 계속 기억해내기 때문에

그 사이사이에 찰라 간의 시차를 두고 계속 일어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세밀히 살피지 못하면, 슬픈 생각과 다른 생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줄 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엉성한가를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작은 화를 내었을 때에는 금방 알지만,

무척 큰 화가 났을 때에는 그 화가 한참 지속되어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 화가 어느 정도 사그라졌을 때에 비로소 자신이 화를 내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이 화를 내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에도,

그 행동이 좋은 행동인지 나쁜 행동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 역시 시간이 지난 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에 마찬가지로

기뻐함과 슬퍼함이 없다.


그것 역시 시간이 지난 후에 가능하다.


이 것을 도식으로 그리면,


1. 화를 냄 -> 2. 자신이 화를 냄을 인식함 -> 3. 화가 어떤 행동인지 분별함 4.->분별한 후에 좋아하거나 싫어함.


내가 이렇게 우리의 의식구조를 간단하게나마 분석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인식구조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위의 글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마음은 한번에 한가지 밖에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난 뒤에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을 판단하고 분별한다.


즉,

실컷 화를 내면서 싸우고 난 뒤에,

싸우는 시점과 시간과 인연된 조건등 모든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 다른 환경과 관점에서

그 싸운 것을 분별하고 후회하고 반성을 하고는 자신을 쥐어뜯는 다는 것이다.


만약에 후회하고 반성하는 그 시점이 싸우는 시점과 동일하다면 왜 싸우겠는가?

마음은 공주병환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최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항상 행하기 때문에,

후회하고 반성하는 마음과 싸우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반드시 반성하는 마음이 우선해서 절대 싸우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이란 놈은 절대로 두 가지를 한몫에 하지 못하고,

또 순간 적으로 잘 잊어먹기 때문에 싸우고 난 뒤에 후회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가 어떤 의미에선,

항상 우리는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비록 후회하긴 하지만,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이 다 변해버린 지난 시점에서 그러할 뿐,

그것을 행할 때에는 오직 그것밖에 없고 그것이 최선인 줄 알기 때문에 그것을 행한다.

안 그러면 왜 후회할 짓을 하겠는가?)


마음은 늘 이런 식이다.

항상 지나간 것을 가지고 분별하고 번뇌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과거의 아음에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에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에도 얻을 수 없다.)

라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얻을 수가 없고(과거심 불가득)

현재에 우리의 행동을 고치려니, 이미 지나간 것밖에 알 수가 없으니 현재에선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고(현재심 불가득)

미래라는 것은 과거의 기억으로 미래를 예상해보지만, 우리의 삶은 항상 새로운 것만 다가오므로, 과거의 기억으로 생성된 예상과는 100%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또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없는 것이어서 얻을 수가 없다(미래심 불가득)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나라고 여기고 있는 놈이 바로 3.의 상태라는 것이다.

분별하는 마음. 즉, 아상을 말하는 것이다.


1의 상태는 나라는 것이 없다.

2의 상태부터 나라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객미분이라는 상태가 바로 1의 상태인 것이다.


화를 낼 때뿐만 아니라,

볼 때, 말할 때, 들을 때, 냄새를 맡을 때, 어떤 행을 행할 등등... 의 시점에는,

나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볼 때에는 보이는 그러한 물체가 보일 뿐이다.

조금의 시차를 두고, 나라는 인식이 들어와 나의 기억속에 있는 지식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저것이 나무구나." 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1의 상태는 바로 자성과 맞닿아 있는 시점이다.

(물론 분별하는 마음이 종자식이 되어서 1의 상태를 일으키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분별하는 마음에 근거하여서 일어난다고는 하나,

다시 분별하는 상태가 아니므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시간이 지난 후에,

분별하는 놈이 나타나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


분별하는 놈이라는 것은 바로 습이 뭉친 것이다. 그래서 업식(業識)이라고 하며

그것은 과거의 경험중에서 자신이 바람직하고 마음에 드는 것으로 잣대를 세워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매 순간 변화하는 현재의 삶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별하는 잣대도 그 순간의 환경에 따라 분별하는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필요에 따라 적당하게 변질시켜서 적용시키는 것이다.

즉,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시켜서 정당성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습이라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은 그것을 피할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도 습을 가지고 계셨다.

사람이 갓 태어나면,

배냇짓이라는 것 이외엔 별다른 습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날이 지나가면서, 자신에게 편하고 이익되는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시작하여,

마음에 들고 이익이 되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고, 그 습이 바로 자신 또는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형성된 모든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렸다고 생각해보라,

무엇이 남는가? 과연 나라는 여길 것이 있는가?

그냥 이러한 존재가 하나 있을 뿐이지...)


그 나라는 것이 마음에 드는 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나누고는

그것을 다시 매 순간의 삶을 판단하는 잣대로 쌓아 놓는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준이다. 비슷하게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의 특별한 의미를 아는 것은 오직 한 존재밖에 없다.)

그래서 옛말에 '하나의 지식이 생기면, 하나의 분별이 는다'고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앞에서 괄호에서 말했지만,

사람마다 같은 습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비슷한 판단은 하지만, 그 세밀한 곳에 들어가면,

모두 다 다르다.

오직, 습은 한 존재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습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지금 당장 습이 사라져 버리면,

밥을 먹을 때마다 숟가락과 젓가락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걸을 때마다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모든 행동과 인식하는 방법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습이 나쁜 것이 아니라.

습이 모이면서, 그것을 가지고 바깥과 내면의 작용을 분별하는 근거가 되기에 나쁜 것이다.


즉,

사람마다 습이 다 다른데,

그 습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니,

어떻게 그것이 정확하겠는가?


예를 들어서 살인을 두고 판단을 하라하면,

크게 봐서 나쁜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살인을 한 이유와 환경과 시점을 세밀히 나누어 가면,

나중에는 모두 다 다른 의견을 내고는,

비슷한 것끼리 나누어서 옳다 그르다 따지며 싸우게 된다.


그 싸우는 이유가 바로 습이 모여서 이루어진 업식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분별 판단하는 놈이다.

그러한데도 사람마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우긴다.

그것을 가지고 자신도 판단하고 남도 판단한다.


그리고 그 분별하는 마음은,

다시 자신의 마음과 바깥의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으로 인하여서,

상황에 대응하는 행을 만들고,

그것으로 또 다시 인과를 짓는 근본이 된다.

그래서, 이 마음을 다시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업식이라고 하면서도, 종자식이라고도 하는 이 마음이 바로 제8아뢰야식이다.


제8아뢰야식을 분별망상의 근원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아뢰야식이 분별망상이라고 하니까,

1의 상태가 아뢰야식인줄 안다.

그것은 착각이다.


육조단경에서 혜능조사님께서 말씀하신


"앞생각에 미혹하면 중생이요. 뒷생각에 깨치면 부처이니라."


한것이나.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無念 - 번뇌망상이 없음)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이란 말처럼,

생각에 다시 분별하여 생각을 덧붙이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고 하고 분별망상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앞생각에 미혹하다는 것은,

이미 일어난 생각에 끄달려서 그것을 옳으니 그르니 하고 생각을 다시 덧붙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혹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의 일이고,

뒷생각에 깨친다는 것은,

뒷생각이 바로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분별이므로 그것을 알고 분별을 그만두면 바로 부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깨달으면 업과 습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습과 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습과 업으로 바깥과 내면의 작용을 분별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습과 업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장선사가 야호선(野狐禪)에서 말한대로,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가 아니라,

"인과에 매이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오백년동안 여우의 몸을 가졌던 주지가

백장의

"인과에 매이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에

여우의 몸을 벗어 던진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결국 습과 업에 매이지 않으므로써 습을 고칠 수가 있고

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아상.

즉, 3.의 분별판단하는 단계에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습득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모든 근거가 들어있다.

그 근거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어릴 때부터 배워온 노력하는 마음과,

도덕적 가치,

그리고,

도를 구하는 자들이 배워서 읽은 경전의 말까지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습이 가지고 있는 판단의식으로,

재해석해서, 제 나름대로 만든 자료들로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 자료는 절대, 비슷한 것은 있어도 다른 존재와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말조차도,

부처님의 말뜻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워온 여러 가지 해석법으로 재해석해서,

저장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은 비슷하지만,

깊이 이야기 해 들어가면,

모두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 것이 바로 아상이라는 것이다.


첫 작용 즉, 1.의 행동은,

아상이 개입되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에, 자성에 가까운 행동이다.


그 행동을 할 때에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 행동이 어떤 행동인지 모른다.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우리의 기억 속의 것으로 그 행동을 비추어 봐서,

과거의 것과 비슷한 것의 개념을 그것에 집어넣어서,


"아... 내가 화를 내었구나."

하고 인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옳으니 그르니 하고 판단하고는,

자신의 행동이 옳으니 그르니 하고 번뇌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의 행을 할 때에는 번뇌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을 하는 지 모르고,

그 행동에는 나라는 것이 미처 개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성의 작용만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객미분이어서,

오직 봄만 있지 보는 대상과 보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본다는 것은,

2의 인식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1.의 인식에는,

봄만 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들음, 말함, 냄새맡음,

그것밖에 없다.

주와 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곳에는 보는 자와 대상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것이 진실한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으로 그 행동을 판단하는 그 것이 우리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분별없이 자성의 작용으로 행하고 있는 매 순간 변화하는 행동들을,

분별하는 고정된 마음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며 쥐어짜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는 이미 행동은 사라지고 없고,

인식하는 행동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그 시차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후회하는 순간과 화를 낸 순간이 같은 시점이요 같은 마음의 상태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금강경에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한 것이다..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아무 것도 진실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시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머물지 않는 바에 마음을 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일어나는 그 마음 그대로 살아라는 것이다.

1의 상태를 분별판단하여서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마음을 옳다 그르다 하면서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얻으려는 것은 3의 마음이 하고 있다.

즉, 마음이란 놈은 원래 없는 놈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래서 분별을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서 마음에 들도록 이해되어야 하고

그 이해됨 속에서 자신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의미를 만들어야 안심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이해를 위한 어떤 것을 끊임없이 얻으려고 하고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알음알이이다.


무소득을 이야기하는 것은,

깨달으면 이미 그렇게 살아왔기에 다시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성은 공하다.

왜 공하냐 하면,

텅 비어서 공적하기 때문이다.

텅 비어서 공적하기 때문에 공적한 것마저 공하여

허공이 텅비었기 때문에 만물이 그 안에서 생기고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그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 순간 일으키고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과 감정들이 그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자성을 떠나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텅 비어서 공적하기에,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분별하여서 헐떡이지 않는 다는 말이다.

우리가 매 순간 일으키고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과 감정들을 분별하지 않으면,

항상 마음이 고요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텅 비고 공적하기에 세상 만물이 그 속에 담기는 것처럼,

모든 것이 평등하여서,(역시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거룩한 것과 비속한 것이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텅 비어서 공적하기에

없다는 것도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있다.

이 삼라만상이 모두 다 있는 그대로.....


텅 비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지 공간적인 의미도 아니고 시간적인 의미도 아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어떤 생각에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내치거나 따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화탕지옥과 같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하지만,

늘 마음이 고요한 것이다.


항상 화탕지옥과 같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한다는 것은,

세상만물은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고 움직이기에,

만물의 축소판인 우리 역시,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는,

생각이 없는 자가 없고 감정이 없는 자가 없고 행동하지 않는 자가 없다.

그것이 없으면 죽은 자이다.


그리고 죽은 자 역시,

그것이 마르고 썩고 분해되어서 지수화풍으로 돌아가고,

다시 인연에 의해 다른 것으로 만들어지는 잠시도 머물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분별된 마음에서 보면,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성을 깨달은 자는 죽음 역시 삶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다.

아니 자성에는 죽음도 삶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성을 깨달은 자는 생사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화냄 -> 온화함

미움 -> 사랑

비속함 -> 거룩함

더러움 -> 깨끗함

고통 -> 평화

구속 -> 자유

밴댕이 속 -> 넉넉함


등등,

우리가 봐서 좋지 못한 것에서 보기 좋은 것으로 가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 좋거나 보기 좋지 못한 것이라고 분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그냥 그것일 뿐이지,

어떻게 그것이 화임을 알고,

미움인 줄 알고,

비속함인 줄 알고

더러움인 줄 알고

고통인 줄 알고

구속인 줄 알고

밴댕이 속 인줄 알 것인가?


그러면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분별하는 그 놈이 화를 내는 자신에게 화를 내고,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분별하는 그 놈이 미워하는 자신을 미워하고,

거룩해야 한다고 분별하는 그 놈이 자신을 비속하게 하고,

더러움을 미워하는 그 놈이 자신을 더럽게 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그 놈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자유를 바라는 그 놈이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다고 구속하고,

밴댕이 속이라고 하는 그 놈이 자신을 더욱 더 밴댕이로 몰아가지 않는가?


진정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은 바로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분별하고 판단하여서

보기 좋게 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없애야할 놈인 것이다.

그러한데도 사람들은 경을 잘못 읽고,

또 계율을 잘못 이해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고 항상 지금 보다 더 나은,

있지도 않는 미래의 자신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자성을 깨달았다는 것을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


텅비어서 공적한 마음으로,

늘 일어나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분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1부터 끝 단계까지의 사유구조는 모두 마음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1의 단계가 비록 나라는 것이 행하는 행이긴 하지만,

종자식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비록 허상이긴 하나,

일어나는 순간 순간에는 자성의 힘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하므로,

바로 자성의 발현이다.

그래서

분별하는 마음 역시, 자성의 작용인 것이다.


그래서 분별하는 마음 역시 그냥 놔두어야 한다.

분별하지 마라고 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 분별했다고 자신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자신을 탓하는 그것이 바로 분별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계가 끊임없이 이어지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에,

그것을 놓아라,

놓는 다는 것은,

그냥 내 버려둔다는 의미이다.

즉,

그것 스스로의 생명을 살다가도록 그것에 맡기라는 말이다.


달마대사가 이런 말을 했다 .


"지혜로운 자는 사물을 따르고 어리석은 자는 마음을 따른다."


사물이라는 것은,

바깥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사물이라고 하지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들

즉, 화, 기쁨, 욕심, 슬픔. 거룩한 생각, 나쁜 생각... 등등도 역시 사물이다.

왜냐하면 비록 내 마음이 만든 것이지만

그것이 인식의 대상이 될 때에는 이미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자는

그 사물들이 인과에 의해 저절로 일어났다 사라지며,

영원히 머물지 아니한 것임을 알고,

또 그것들이 자신의 본 모습에는 조금도 물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의 생명주기에 맡겨서 인위적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이고,


어리석은 자는,

사물들이 영원히 자신에게 머물러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하려는 줄 알거나,

또, 자신의 본 모습을 알지 못하기에 그것에 물들까 두려워한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어떻게든 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들의(바깥의 사물이나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들) 삶을 살고

스스로 사라질 것을,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 보라, 마음이 잠시라도 머무는지....끊임없이 온 곳도 없이 간 곳도 없이 변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에 매여서 시비를 하며 잡고 있으니,

그것들이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늘 번뇌로우며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사물에 맡긴다는 것이 바로,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그냥 분별없이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익숙해지면,

바라본다는 것도 없어진다.

그냥 산다.


다시 말해

분별하는 마음조차도

그 순간에 자신이 분별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조금 지나서야 비로소 분별하고 있는 자신을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분별하는 마음도 뒤에 분별하는 마음에서 보면 이미 지난 것이므로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분별하는 마음 역시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내버려두라는 것은,

다른 의미로 설명을 하면 건드리지 마라는 말과 같다.


마음이란 놈은 원래 없기 때문에 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야만 안심을 한다.

그래서,

거룩한 것과 비교해서 자신이 거룩하지 않으면 자신을 학대한다.

그리고 좀 잘했다 싶으면 또 다시 흐뭇해한다.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든 사랑하든 어떻게든 건드려주길 원한다.


우리의 사회에도 이러한 일들이 있지 않은가?


합법적이지 못한 단체와는 정부가 절대 협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유가 바로,

협상(건드려주는 것)한다는 것은 그 단체를 실체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드리지 않으려 한다.


그처럼,

마음이 허상이기에 건드리면 실체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또 다시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우리를 부리려고 한다.


그러나,

무관심하게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면,

마음이 원래 없는 놈이기 때문에,

자기가 살려고 한동안 우리를 꼬드기고 협박하고,

마치 죽을 듯한 감정까지 가져와서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면 분별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하는 그 마음조차도 내버려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에도 또 공 아님에도 매이지 않는 삶이다.


사물들을 내버려두고,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생각들이 오고가서 항상 들끓지만,

분별하지 않으므로 그것에 끄달리지 않아 마음은 항상 고요하다.


이것은 마치 모순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

즉,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지켜보니 자재롭게 지켜보는 것이고,

그래서 걸림이 없고 마음이 항상 고요하니,

큰 지혜의 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고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니,

나라는 것이 사라진다.

그러면,

앞의 다섯가지 바라밀은 지키지 않으래야 지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읽어서,

분별의 여의지 아니한 생 마음으로 지키려니,

어찌 제대로 지켜지겠는가?


어쩌다가 한 두번은 지키겠지만,

분별이 있으니, 어기는 것이 다반사일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일어나는 마음에 끄달려서 끊임없이 헤매는 삶을 되풀이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얻으려는 마음을 버려라,

늘 일어나는 그대로의 마음을 따라서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어라,

그것이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삶이며,

혜해선사께서 요문론에서 말씀하신,


"만약 일체 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는 한 모양(一相)도 얻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느니라.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다 함은 곧 진여의 실상이니 진여의 실상이란 여래의 묘한 색신의 모양이니라."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분별하는 마음은,

늘 과거의 마음으로 현재를 판단하는 것이며,

그것도 분별 판단할 때에는,

판단의 대상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도 얻을 수가 없다.


얻으려는 마음, 즉 분별하는 마음은 상을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일체의 삼라만상은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여서 고정된 상이 없는데,

이 마음은 항상 고정된 상을 바라고 얻으려고 한다.

그러니,

어찌 여래의 묘한 색신을 볼 수가 있겠는가?

여래의 색신이라는 것은,

바로,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고 흘러가는,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요 삼라만상인데

고정된 상을 바라는 눈으로 어찌 재대로 볼 수가 있겠는가?


유마가 병이 난 이유가 바로 중생의 분별하는 병때문이다.

삼라만상(내면의 마음도 삼라만상임)이 유마의 몸이요,

분별치 않으면 삼라만상이 모두 완전하건만(병이 없건만)

중생들이 분별하는 병에 걸려서 저마다 삼라만상을 완전치 못하다 하니,

유마에게 없는 병이 어찌 생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분별하는 마음을 고치시기 위해서 유마경을 설하신 것이다.


분별을 여의라,

그리고 분별하는 그 마음조차 분별하지 마라,

그러면,

마음이 항상 고요하여서,

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래야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의 마음부터 분별하지 마라,

그러면,

마음이 고요하여서,

바깥을 보는 것에도 분별이 없다.

그러면,

저절로 시비가 사라져서

그 토록 없애고 싶어하는 자신의 나쁜 모습은

모두 분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고,

자신의 나쁜 모습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다만, 분별하는 모습은 기가막히게 알아낸다.

그래서 그에게 그것이 무거운 것이요 자신을 망치는 것임을 알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때론 모진 말도 하고 고통에 빠뜨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별을 여윈 자에게는 미움이 없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밖에 없다.

그 사랑이 때로는 화로 나타나고, 봉(捧)으로 할(轄)로 나타나는 것이다.)


분별하는 마음도 마음이요.

처음 일어나는 마음도 마음이어서,

다 같은 한놈인데

어찌 마음으로 마음을 조절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물로 물을 씻는다."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분별을 여의면,

매 순간의 자신이 바로 자성의 공함과 다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매 순간 생각이 끊이지 않지만,

항상 자신이 고요함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沈般若波羅密多時)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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