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백장록(百丈錄)

백장광록 5.

slowdream 2007. 9. 11. 13:45
 

12. 


또 물었다.

"지금 사문들은 다들 말하기를,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경(經)·논(論)·율(律)·선(禪)과 지식(知解)을 낱낱이 배우므로 신도들에게 네 가지로 공양을 받을 만하다' 고들 하는데 정말 받을 만합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조하는 작용(照用)으로 볼 때 소리[聲]·색(色)·냄새[香]·맛과[味]·유(有)·무(無) 모든 법 등 낱낱의 경계에 티끌만큼의 집착이나 물들음도 없고,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매일 만 냥의 황금도 받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유·무 등 모든 법을 대할(照) 때 6근의 반연을 다 깎아내 털끝만큼도 탐욕과 애착을 다스려 버리지 못하고, 나아가서는 시주에게 쌀 한 톨 실낱 하나라도 구걸한다면 축생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끌려 다니면서 하나하나 갚아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집착이 없는 사람이며 구함이 없는 사람이며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 분주하게 부처가 되고자 탐착한다면 모두가 등지는 짓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랫동안 부처를 가까이 하면서도 불성(佛性)을 모른 채 세상을 구제하는 자를 구경할 뿐, 6취(六趣)에 윤회하면서 오랫만에야 부처를 보는 자, 그를 두고 부처 만나기 어렵다 한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수는 7불의 스승이며 사바세계에서 으뜸가는 보살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부처를 보노라' '나는 법을 듣노라' 하는 근거 없는 생각을 내어 부처님에게 위신력을 받고 두 철위산(鐵圍山)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모든 학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고, 후학들이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보배 여의주' 라 하며, '보배 꽃으로 발꿈치를 받쳐든다' 하는 것이다.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내는 것은 유·무 등으로 보는 것이니 이것을 두고 '눈병 난 눈으로 사물을 본다' 고 하며, '봄에 매임(見纏)', '봄에 덮임(見蓋)' 또는 봄의 재앙(見蘖)이라고도 한다.

이제 생각생각 모든 견문각지(見聞覺知)와 모든 티끌 때를 다 없앤다면 한 티끌 한 색이 온통 한 부처이며 한 생각 일으켰다 하면 그대로 한 부처인데, 3세5음(三世五陰)의 생각 생각이라면 그 숫자를 뉘라서 헤아리겠는가. 이것을 '허공을 가득 메운 부처'라 하며, '분신불(分身佛)', '보배탑' 이라 하니, 그러므로 항상 찬탄하는 것이다.


지금 연명하는 것을 보면 쌀 한 톨과 한 포기 채소에 의지한다. 먹지 못하면 굶어 죽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목말라 죽으며, 불을 쬐지 못하면 추워서 죽는다. 하루라도 없으면 살지 못하고, 하루쯤 없다 해도 죽지는 않으나 4대(四大)에 붙들려 여전하지 못하다.


도통한 옛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다. 불에 타고자 하면 탔고, 물에 빠지고자 하면 빠지지 않았다. 살겠다면 살았고, 죽겠다면 죽었다. 이렇게 가고 머물음이 자유로우니, 그에게는 자유로울 분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면 부처를 구하거나 보리·열반 구할 필요가 없다. 만일 부처를 집착하고 구한다면 탐심에 속하며, 탐심이 변하여 병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 병 고치기가 가장 어렵다' 고 하는 것이다.

불법을 헐뜯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의 밥이란 신령하게 알아보는 자기 본성으로서 번뇌 없는 밥(無漏飯)·해탈밥(解脫飯)을 말한다. 이 말은 10지(十地)보살을 치료하는 것으로서 초발심부터 십지에 이르기까지이다.

지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모두다 '파계승', '명자나한(名字羅漢)' 또는 '여우' 라 이름하는데, 그들은 분명히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지금 메아리같이 고르게 소리를 듣고, 바람같이 평등하게 냄새를 맡으면서 일체 유·무 등의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허물도 얽어매지 못한다.


위없는 보리·열반을 구하기 때문에 '출가'라고 이름하나 그래도 그것은 삿된 발원이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안다' 하면서 세간에서 승부를 다투며 논쟁하는 경우이겠는가.

한 문중을 탐하고 한 제자를 아끼며, 한 안주처에 연연해하고 한 신도와 관계를 맺는다. 옷 한 벌, 밥 한 그릇, 명예 하나, 이익 하나에 다시 '나는 그 모두에 걸림이 없다' 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자기 5음(五陰)에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몸 마디마디가 토막난다 해도 원망하거나 아깝다는 마음이 전혀 없고 번뇌도 없다면, 나아가서는 자기 제자가 다른 사람에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채찍을 맞고 이상과 같은 낱낱의 일을 당한다 해도 한 생각도 너다 나다 하는 마음이 없다며, 그래도 한 생각도 없다는 그것을 옳다고 여겨 거기에 머문다면 그것을 '법 티끌' 이라 하니, 10지(十地)에서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사람들에게 권하기를 '삼악도(三惡道)를 두려워하듯 이 법 티끌을 두려워해야만 홀로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고 하는 것이다.


가령 열반을 능가하는 어떤 법이 있다 해도 조금도 값지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걸음마다 부처로서 연꽃을 밟을 것도 없이 백억의 몸을 나툰다.

유·무 등 모든 법에 털끝만큼이라도 애욕에 물든 마음이 있다면 연꽃을 밟고 다닌다 해도 마군의 짓과 똑같은 것이다.


'본래 청정하다' 거나 '본래 해탈하였다' 는 데에 집착하여 이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이해했다고 자처하는 자는 자연외도(自然外道)에 속하며, 한편 인연에 집착하여 닦아 증득을 이루는 자는 인연외도(因緣外道)에, 무(無)에 집착하면 단견되도(斷見外道)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는 데 집착하면 변견외도(邊見外道) 또는 우치외도(愚痴外道)에 속한다.


'부처다, 열반이다' 하는 등의 견해를 내지 않기만 하면 된다. 유·무 등 모든 견해가 전혀 없으며 견해가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봄(正見)이라 한다. 또한 아무 것도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들음(正聞)이라 하며, 이것을 두고 외도를 꺾었다 하는 것이다.

또한 범부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아주 신통한 주문(大神呪)이며, 보살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가장 높은 주문(無上呪)이며, 나아가 부처라는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견줄 바 없는 주문(無等等呪)이다. 중생 아수라를 변화시키고 2승 아수라를 변화시키며, 보살 아수라를 변화시키니, 이렇게 하여 3변정토(三變淨土)가 되는 것이다.


유무(有無) 범성(凡聖) 등 모든 법은 광석에 비유되고, 자기의 여여한 이치(如理)는 금(金)에 비유된다. 금과 광석이 분리되면 순금이 드러나니 홀연히 어떤 사람이 돈과 보배를 찾으면 금을 돈으로 만들어 그에게 주는 것이다. 마치 국수 자체는 진정 모든 모래와 진펄이 없어 어떤 사람이 시루떡을 구걸하면 국수를 시루떡으로 만들어 주는 것과도 같다.

또는 지혜로운 신하가 왕의 마음을 잘 알아서 왕이 행차할 때 선타파(先陀婆)하고 부르면 즉시 말을 대령하고, 밥 먹을 때 선타파(원래는 소금, 그릇, 물, 말(馬)을 뜻하는 말, 왕의 마음을 잘 아는 총명한 신하가 제 때 제 때 알아서 이것들을 바친 데서 유래하여, 지혜로운 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하고 부르면 즉시 소금을 바치는 것과도 같다.

이상은 현묘한 종지를 공부하는 사람이 잘 통달하여 어김없이 기연에 응함을 비유한 것이며, 또는 육절사자(六絶獅子:6근·6진을 끊은 사람)라고도 한다.


지공(誌公)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에 따라 백 가지 변화를 지어낸다' 고 하였다.

10지(十地)보살은 주리지도 않고 배부르지도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태우려 해도 태울 수 없으니, 일정한 테두리(量數)에 의해 한계 지워진다.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서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지만, 타려 하면 타고 빠지려 하면 빠진다. 바람·물 등 4대를 자유롭게 부리므로 모든 색이 부처님 색이며, 모든 소리가 부처님 소리다.


더러운 찌꺼기인 변하는 자기 마음이 다하여 3구(三句) 밖으로 뚫고 지나야 이 말을 할 수 있다. 청정한 보살 제자는 매우 밝아서 무슨 말을 하든지 유무에 집착되지 않고 모든 작용(照用)에 있어서도 청탁에 구애되지 않는다.


병이 있는데도 약을 먹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병이 없는데 약을 먹으면 성문(聲聞)이다. 한 가지 법을 단정적으로 집착하면 정성성문(定性聲聞)이며, 그저 많이 듣기만 하면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이다. 또한 남을 알면 유학성문(有學聲聞)이며, 공정(空寂)에 빠지고 자기를 알면 무학성문(無學聲聞)이다.


탐·진·치 등은 독이며 12분교(十二分敎)는 약이니, 독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약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병 없이 약을 먹으면 약이 도리어 병이 되어, 병이 없어져도 약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음은 무상(無常)의 의미이다.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 가지 약한 욕심이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이 에워 싸주었으면 하는 욕심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이 내 문도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며, 셋째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성인이나 아라한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다'.


또한「가섭경(迦葉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는 미래의 부처님을 뵈었으면 하는 것이며, 둘째는 전륜왕(轉輪王)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며, 셋째는 찰리(刹利)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넷째는 바라문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약한 욕심부터 먼저 끊어야 한다. 집착하고 물들어 요동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을 '악한 욕심' 이라 하는데, 모두가 6욕천(六欲天)에 들어가 파순(波旬)에게 부림을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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