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백장록(百丈錄)

백장광록 6.

slowdream 2007. 9. 11. 13:46
 

13. 


또 물었다.

"이십년 동안을 항상 '똥을 치우라'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지견을 쉬고 모든 탐욕을 쉬어 낱낱이 3구(三句) 밖으로 뚫고 지나면 이를 '똥을 치웠다' 고 한다. 부처와 보리를 구하며, '있다, 없다' 는 등의 모든 법을 구하면 그것은 똥을 퍼 들여오는 것이지 똥을 퍼낸다고 하지는 않는다.

부처라는 견해를 지어내서 볼 것이나 구할 것, 집착할 것이 있다 하면 '희론의 똥' 이라 하며, '거친 말', '죽은 말' 이라 한다. 마치 '큰 바다는 죽은 시체를 잠재우지 않는다' 한 말과도 같다.

부질없이 지껄이는 말을 '희론'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청(淸)·탁(濁)을 분별하면 그것을 '희론'이라 한다.


경전에서는 모두 스물한 가지 공(空)으로 중생의 티끌 번뇌를 닦아 없애준다고 한다. 또한 사문이 재계(齋戒)를 지키고, 인욕과 화합을 닦으며 자비희사(慈悲喜捨)하는 것은 일상적인 승가의 법도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완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니 탐착으로 의지하는 것을 인정 할 수는 없다. 부처나 보리 등의 법을 얻고자 하는 자는 손을 불에 갖다 대는 것이다.


문수보살은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기만 하면 자기를 다치게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부처님 앞에서 칼을 빼어들었고, 앙굴마라는 부처님에게 칼을 들이댔던 것이다.

저 '보살은 5무간업(五無間業)을 지어도 무간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다' 고 한 말씀과도 같다. 그들 보살은 원통(圓通)으로 빈틈없으니 5역죄(五逆罪)로 빈틈없는 중생의 그것과는 다르다.


파순으로부터 부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진 기름때를 털끌만큼도 갖지 않는다 해도 그런 데에 의지하여 집착하면 '이승의 도' 라 한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이해한다' 하며 논쟁과 승부 다투는 말을 하는 경우이겠는가.

이들은 논쟁승(論爭僧)이지 무위승(無爲僧)은 아니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탐착하여 물들지 않으면 이를 '남이 없음(無生)' 이라 하며, '바른 믿음(正信)' 이라고도 한다.

일체법을 믿고 집착하면 '믿음을 갖추지 못했다' 하며,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다', '치우쳐서 고르게 믿지 못한다' 고 한다. 그러므로 이를 일천제(一闡提:성불할 종자가 없는 중생)라고 이름한다.


이제 단박에 깨치려 하는가. 사람(人)과 법(法)을 동시에 딱 끊어 비우고(空), 3구(三句) 밖으로 꿰뚫어야 하니, 그것을 '온갖 테두리에 떨어지지 않는다' 고 한다.

여기서 '사람' 이란 믿음이며, '법' 이란 계율·보시·지혜(聞慧)등이다.

보살은 차마 성불하지 않고 차마 중생이 되지도 않으며, 차마 계율을 지니지도 않고 차마 파계를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지키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는다' 고 하였던 것이다.


지(智)는 흐리고 관조(照)는 밝으며, 혜(慧)는 맑고, 식(識)은 탁하다.

부처로 말하자면 관조하는 지혜(照慧)라고 하며, 보살이면 지(智)라 하고, 이승과 중생 쪽으로 치면 식(識) 또는 번뇌라고 한다.


부처라는 결과 속에는 중생이라는 원인이 들어 있고, 중생 원인 속에도 부처라는 결과가 들어 있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법륜을 굴린다(轉法輪)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법륜이 구른다(法論轉)하고, 보살에 있어서는 영락장엄구(纓珞莊嚴具)라 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오음총림(五陰叢林)이라 한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본지무명(本地無明)이라 하는데, 이는 무명의 밝음(無明明)이다. 그러므로 '무명이 도의 바탕이 된다' 하였으니, 어둡게 가리운 중생의 무명과는 다르다.

저것(彼)은 객관이고 이것(此)은 주관이며, 저것은 들리는 것(所聞)이고 이것은 듣는 것(能聞)이다. 그것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不一不異), 아주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으며(不斷不常),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不去). 살아 있는 말(生語句)이며, 틀을 벗어난 말 (出轍語句)로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다 이와 같다.


'온다, 간다', '단멸(斷滅)이다, 영원하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죽은 말이다. '두루하다, 두루하지 않다', '같다, 다르다', '단멸이다, 항상하다' 하는 등은 외도의 설이다.

반야바라밀은 자기 불성인데 '마하연(摩詞衍)' 이라고도 한다. 마하(摩詞)는 크다는 뜻이고, 연(衍)은 수레(乘)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자기의 지각(知覺)을 지켜 머물면 또한 자연외도(自然外道)가 된다. 지금의 비추어 깨달음(鑑覺)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따로 부처를 구할 것도 없다. 따로 구한다면 인연외도(因緣外道)에 떨어진다.


이 땅의 초조(初祖)께서는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르다 할 것도 있게 된다' 고 하셨다. 어떤 것을 귀중하게 여기면 그것에 혹하게 되니, 믿으면 믿는데 혹하고 믿지 않으면 비방을 이룬다. 그러므로 '귀하다, 귀하지 않다' 하지말고, '믿는다, 믿지 않는다' 하지도 말라.

부처님은 무위(無爲)도 아니다. 무위가 아니라 해서 허공과 같은 적막함도 아니다. 또한 부처님은 허공같이 큰마음을 가진 중생(大心衆生)으로서 비추어 깨달음이 많다. 비록 많다고는 하나 그 비추어 깨달음은 청정하여 탐내고 성내는 귀신이 그를 붙들지 못한다.


부처님은 온갖 번뇌를 벗어난 분으로 털끌 만큼의 애욕과 집착이 없으며, 애욕과 집착이 없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이를 6도만행(六度萬行)을 빠짐없이 갖추었다고 한다. 장엄구(莊嚴具)가 필요하다면 갖가지가 다 있으며, 필요치 않아서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잃지 않는다.

이렇게 인과와 복지(福智)를 자유롭게 부린다. 이는 수행이며 수고롭게 일을 하며 무거운 짐을 진 것은 아니데, 이를 수행이라 부른다 해도 도리어 이 같지 않다.


삼신이 한 몸(三身一體)이며, 한 몸이 삼신(一體三身)이다.

첫째는 법신실상불(法身實相佛)로서 법신불은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니 밝음과 어둠은 허깨비의 변화에 속하는 것이다. 실제의 모습(實相)은 헛것(虛)을 상대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본래 이름이란 없는 것이다. '부처님 몸은 함이 없어(無爲) 어떤 테두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한 것과도 같다.


성불하여 일신을 공양하는 등은 한 됫박 한 홉 들이쯤 되는 말이다. 요컨대 탁함을 상대로 맑음을 가려내 붙인 이름이므로 '실상법신불' 이라 한 것이다.

또한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라 이름하며, 허공법신불, 대원경지(大圓鏡智:제 8식의 전변), 제8식(第八識), 성종[性宗: 차별상을 중심으로 일체법을 설하는 상종(相宗)에 대해 평등하고 진실된 성품을 설하는 종지], 공종[空宗: 상(相)을 부정하여 일체법의 실상인 공(空)을 설하는 종지. 중국에서는 유종(有宗)과 공종(空宗), 혹은 상종(相宗)과 성종(性宗)으로 제교(諸敎)를 분류해 왔는데 유종, 상종에는 소승과 유식, 공종, 성종에는 삼론종, 화엄종 등이 있다.],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불국토, 굴속에 있는 사자, 금강후득지[金剛後得智; 금강정(金剛定)을 얻은 뒤 다시 차별지를 써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지혜], 무구단(無垢檀), 제일의공(弟一義空), 현묘한 종지(玄旨)라 이름 붙이기도 한다.

삼조(三祖)께서 말씀하시기를,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생각만 고요히 한다' 고 하였다.


두번째 보신불(報身佛)로서 보리수 아래의 부처님이다. 또는 환화불(幻化佛)이라고도 이름하며, 상호불(相好佛), 응신불(應身佛), 원만보신노사나불, 평등성지[平等性智:제7식의 전변], 제7식(第七識), 인과에 응하는 부처님(酬因答果佛)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52선나수(五十二禪那數)와 같고, 아라한, 벽지불, 모든 보살과 같다. 또한 생멸 등의 괴로움을 받는 것도 똑같지만 중생이 업에 매어 고통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세번째는 화신불(化身佛)로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아무런 집착과 물듦이 없으며, 물들음이 없다는 것마저 없다. 4구(四句)를 벗어나 훌륭한 말솜씨를 갖추셨으니 화신불이라 이름한다.

이 분이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며, 대신변(大神變)이며, 유희신통(遊戱神通), 묘관찰지[妙觀察智:제6식의 전변], 제6식(第六識)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공양하면 3업(三業)이 청정해져서 전(前際)에도 끊을 번뇌가 없었고, 지금(中際)도 지킬 자성이 없으며, 뒤에(後際)에도 이룰 부처가 없다. 이렇게 3제(三際)가 끊겼고, 3업(三業)이 청정하며, 3륜(三輪)이 공적하고, 3단(三檀)이 공(空)하다.

무엇을 '비구가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신다' 하는가? 6근(六根)에 번뇌(漏)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장엄하다고도 하는데, 모든 번뇌가 빈(空無)것을 수풀과 나무로 장엄했다 하며, 모든 물듦이 빈 것을 꽃과 열매로 장엄했다 하는 것이다.


빈(空無) 불안(佛眼)으로 수행인을 파악하고 법안(法眼)으로 청탁을 분별하면서 청탁을 분별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그것을 눈 없는 데(無眼)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보적경(寶積經)」에서는 '법신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으로는 구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색(色)이 없기 때문에 육안(肉眼)으로 볼 것이 아니며, 망정이 없으므로 천안(天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모습을 떠났으므로 혜안(慧眼)으로도 볼 수 없고, 모든 행(行)을 떠났으므로 법안(法眼)으로 볼 것도 아니며, 모든 식이 떠났으므로 불안(佛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부처의 생각(佛見)이라고 한다.

색(色)은 색이나 형색(形色)이 아님을 진색(眞色)이라 하며, 공(空)은 공이나 창공(太虛)이 아님을 진공(眞空)이라 하나, 색과 공도 또한 약과 병이 서로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법계관(法界觀)에서는 '색(色)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 없으며, 공(空)에 즉했다느니 공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도 없다' 라고 하였다.


눈·귀·코·혀·몸·의식에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제7(第七地)에 전변해 들어간다'고 한다. 7지(七地)보살은 칠지에서 물러나지 않고 위로 3지(三地)를 올라(向上)간다.

보살의 심지(心地)는 명백(明白)하여 쉽게 오염되어 불이라고 말만해도 바로 탄다.

색계(色界)에서 올라가면 보시가 병이고 간탐(貪)이 약이며, 색계에서 내려가면 간탐이 병이고 보시가 약이 된다.


유작계(有作戒)란 세간법을 끊는 것이며, 다만 몸과 손으로 조작하지 않아 허물이 없으면 이를 무작계(無作戒)라 하며, 또는 무표계(無表界), 무루계(無漏戒)라 하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을 움찔했다(擧心動念)하면 모조리 파계(破戒)라 하는 것이다.

이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에 혹하지 않고 혹하지 않는 데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그것을 '빠짐없이 배우고 부지런히 생각(護念)하며 널리 유포한다' 고 한다.


깨닫지 못했을 때를 어미(母)라 하고, 깨닫고 나서를 자식(子)이라 하는데, 깨달음이 없다는 생각도 없음을 '어미 자식이 동시에 없어짐' 이라 한다.

이렇게 선에도 매이지 않고 악에도 매이지 않으며, 부처에 얽매이지도 않고 중생에게 매이지도 않는다. 테두리(量數)에도 마찬가지며, 나아가서는 아무런 테두리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얽매임에서 벗어나 한량을 뛰어넘은 사람이다' 라고 말한다.


앎(知解)이나 설명(義句)에 탐착하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여 소락(酪)을 많이 먹이기만 할 뿐 소화가 되고 안 되고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 말은 10지(十地)에 비유된다.

즉 인간·천상에게 존대받는 번뇌,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 선정과 복락을 누리는 번뇌, 자유롭게 신통으로 날며 숨고 난타나면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 정토(淨土)에 두루 다니며 법을 듣지 못하는 번뇌, 자비희사(慈悲喜捨)와 인연(因緣)을 닦는 번뇌, 공(空)과 평등한 중도(中道)를 닦는 번뇌, 3명(三明)·6통(六通)·4무애(四無碍)를 닦는 번뇌, 대승심을 닦아 사홍서원을 발하는 번뇌, 초지, 2지, 3지, 4지에서 분명히 이해하는 번뇌, 5지, 6지, 7지에서의 모든 지견(知見)번뇌, 8지, 9지, 10지에서 이제(二諦)를 동시에 관조하는 번뇌와 나아가서는 불과(佛果)를 닦는다.

백만 아승지겁 동안 행하는 모든 번뇌까지 설명이나 앎을 탐할 뿐 도리어 얽어매는 번뇌임을 모른다. 그러므로 '강을 보아야만 향상(香象)을 띄울 수 있다' 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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