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현삼요(三玄三要)
임제스님이 또 말씀하셨다.
“한 구절의 말에 반드시 삼현문이 갖춰져 있고, 일현문에 반드시 삼요가 갖춰져 있어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다. 그대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하시고는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 진실한 자리에는 본래로 먼지 하나 두지 않는다. 그래서 공공적적하다. 이론이나 문자를 세우지도 않는다. 닦고 깨닫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근기를 섭수하고 교화불사를 일으키는 마당에는 한 가지 법도 버리는 일이 없다. 그래서 좀 어수선하다. 이해하고 참아야 한다.
임제스님은 삼현삼요에 대해서 위의 말씀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구한 설명이 따라다닌다. 우선 “한마디 말에는 반드시 삼현문이 갖춰져 있다”라고 했는데, 그 삼현이란 현중현(玄中玄)과 구중현(句中玄)과 체중현(體中玄)이다. 현중현은 말의 그 자체로서의 진실이다. 구중현은 말의 인식 위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체중현은 말의 실천 속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경우가 한마디 말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 이러한 설명도 가능하다. 한마디 말에 공관(空觀)의 입장과 가관(假觀)의 입장과 중도관(中道觀)의 입장이 있다. 진제(眞諦), 속제(俗諦),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도 있을 수 있다. 한마디 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이 다 가능하다.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세 가지로 현묘하고 유현하게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을 만났을 때 또는 제자들을 훈도할 때 말의 활용을 나타낸 것이다. 법문의 깊고 얕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면문에 반드시 삼요가 갖춰져 있다는 삼요란 세 가지 중요한 것, 세 가지 요점, 즉 본질[體]과 현상[相]과 그 작용[用]이다. 이 본질과 현상과 작용이란 무슨 물건 어떤 말에도 다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람을 제접할 때 근기의 활용을 나타낸 것이다. 법문의 얕고 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구 중에 삼현문이 있고, 일구 중에 구요(九要)가 갖추어져 있다.
다시 모르는 말 한마디 더한다. 제일구를 운문종으로 치면 다종다양한 부류의 근기들을 단칼에 다 잘라버린다. 조동종으로 치면 바른 위치다. 그리고 소탕이다. 제이구는 운문종으로 치면 하늘과 땅을 다 덮어버린다. 조동종으로 치면 치우친 지위다. 그리고 건립이다. 제삼구는 운문종으로 치면 파도를 따르고 물결을 좇아간다. 조동종으로 치면 모든 것을 함께한 가운데 이른 것이다.
임제록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삼구와 삼현과 삼요이다. 하지만 순전히 엉터리다. 그렇다면 엉터리가 아닌 강설은 무엇인가. 이제 여러분도 다 아는 ‘할’이다. ‘할’을 하는 나다. 활발발한 무위진인이다. 오로지 이 사실만 진실이다.
출처 : <임제록 강설>(무비스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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